앙골라 독립과 MPLA 정권 형성
식민지 독립은 왜 내전과 결합했고, MPLA는 어떻게 국가와 전위당을 구성했는가?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은 해방운동 세력 간 내전과 외국의 군사 개입 속에서 이루어졌다. MPLA는 루안다에서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아고스티뉴 네투가 대통령이 됐다.
포르투갈 혁명과 경쟁하는 해방운동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은 식민지전쟁을 지속하던 체제를 무너뜨리고 독립 협상의 길을 열었다. 앙골라에서는 아고스티뉴 네투의 MPLA, 홀덴 로베르투의 FNLA, 조나스 사빔비의 UNITA가 서로 다른 조직 기반과 대외관계를 갖고 경쟁했다. 세 운동을 단순히 같은 목표의 분파나 외국의 대리자로만 보면, 국내의 지도권 경쟁과 사회적 기반의 차이를 놓치게 된다. 근거 1
알보르 협정의 붕괴와 국제화된 전쟁
1975년 1월 알보르 협정은 세 운동이 참여하는 과도정부와 11월 독립을 예정했다. 그러나 독립 뒤 군대와 국가를 누가 통제할지 합의하지 못한 채 무력 충돌이 확대됐다. MPLA는 루안다에서 경쟁세력을 몰아냈고 과도정부는 여름에 붕괴했다. 독립이 다가올수록 공동 통치보다 각 세력의 독자적 영토·행정 장악이 앞섰다. 근거 2 · 근거 3
자이르와 미국은 FNLA 등을 지원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군사 개입은 전쟁을 지역적 충돌로 확대했다. MPLA는 소련의 무기와 쿠바 병력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개입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MPLA를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외부 지원은 전세를 바꿨지만 국내 경쟁의 원인이 모두 냉전에서 수입된 것은 아니었다. 근거 1 · 근거 4
1975년 독립과 MPLA 정부의 우위
11월 11일 포르투갈은 어느 한 세력에 국가 전체를 넘기지 못한 채 앙골라의 독립을 인정했다. MPLA는 루안다에서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FNLA·UNITA도 경쟁 정부를 주장했다. 1976년 초 MPLA의 군사적 우위가 굳어지고 아프리카통일기구 등 국제적 승인이 확대됐다. 국가의 대외 대표권을 확보한 것과 영토 전체에서 전쟁을 끝낸 것은 달랐으며, UNITA의 무장투쟁은 계속됐다. 근거 5
전후 경제: 국유화와 석유 부문의 공존
포르투갈인 기술자·관리자의 대규모 이탈과 전쟁 피해는 기업·농장·운송망을 마비시켰다. 정부의 기업 개입과 국유화에는 사회주의적 소유구조를 만들려는 목적뿐 아니라 버려진 사업장을 다시 가동하려는 긴급 대응도 있었다. 그러나 관료조직의 미숙함, 유통망 파괴, 농민에 대한 강제적 조직화는 생산 회복을 어렵게 했다. 국유화라는 법적 변화와 실제 경영 능력은 별개의 문제였다. 근거 6
한편 석유는 서방 기업이 생산·판매에 참여하는 가운데 정부 재정을 지탱했다. 따라서 MPLA의 사회주의 노선은 외국 민간자본이 전혀 없는 경제를 뜻하지 않았다. 국가가 석유 수입을 얻는 부문과 농촌 주민의 식량·생계 생산 사이의 격차, 안보 비용과 재건 투자 사이의 경쟁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후에도 경제를 평가할 때 당의 공식 이념과 실제 소유·거래 구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근거 6 · 근거 7
1977년의 당내 충돌과 전위당 전환
MPLA 내부에도 국가 운영과 혁명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1977년 5월 니투 알베스와 관련된 세력의 행동을 정부는 쿠데타 시도로 규정했고, 이후 광범위한 체포와 처형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의 조직·책임·희생 규모에는 논쟁과 기록상의 공백이 있어 단일 추정치를 확정 사실로 제시하기 어렵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세력 내부의 차이도 독립 정권의 강압 아래 제거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근거 8 · 근거 9
1976년 공식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채택에 이어 1977년 12월 제1차 당대회는 MPLA를 MPLA 노동당으로 재편했다. 해방운동의 폭넓은 연합에서 엄격한 당 조직으로 이동하면서 국가와 당의 지휘체계가 밀착됐다. 이 과정은 독립과 동시에 완성된 체제가 아니라, 내전과 내부 갈등을 거치며 권력을 집중한 전후 국가 형성의 한 단계였다. 근거 10
승인이 먼저인가, 노선이 먼저인가: 1976년의 이중 국면
1976년 한 해는 루안다 정부에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전선이 한꺼번에 열린 해였다. 바깥에서는 남아프리카군과 자이르군을 몰아내고 우암부·벵겔라를 탈환한 군사적 우위를 외교적 승인으로 바꾸는 일이, 안에서는 아직 ‘당’도 ‘국가’도 아닌 상태의 MPLA를 무엇으로 만들 것인지 둘러싼 다툼이 동시에 진행됐다.
승인은 빠르게 굴러갔다. 남아프리카 방위군이 1976년 1월부터 철수하고, 쿠바군이 루안다 정부 편에서 2월까지 1만 1천 명으로 불어난 뒤, 아프리카 각국은 하나둘 MPLA 정부를 아프리카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미시간주립대가 정리한 연대기에 따르면 이미 28개 아프리카 국가가 ‘MPLA가 이끄는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승인한 상태였고, 1976년 2월 아프리카통일기구(OAU)는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제47번째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이 승인은 단순한 의전이 아니었다. OAU 회원 자격과 가맹국들의 개별 승인이 없었다면 UNITA·FNLA의 ‘앙골라 인민민주공화국’은 계속해서 ‘경쟁 정부’로 남아 서방과 남아프리카의 개입 명분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루안다 지도부의 관심을 더 오래 붙든 것은 안쪽 노선이었다. MPLA는 1961년 이래 ‘넓은 민족해방운동’으로 존재해 왔고, 1976년 초까지도 공식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이 아니었다. 이 빈자리를 둘러싸고 당 안에서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내무장관 니투 알베스는 젊은 활동가·노동위원회·빈민 조합과 맺고 있던 ‘인민권력’(poder popular) 진영을 이끌며, 1976년 3월 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에 앙골라 대표단을 이끌고 가 자신을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파’의 대표로 내세웠다. 그가 대회 연설에서 ‘인민권력법’이 ‘사회주의 건설로의 과도기를 열었다’고 선언한 것은, 모스크바의 인정을 등에 업고 네투의 대통령파를 좌익·우익 양쪽에서 압박하려는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네투 지도부는 이 도전을 단순한 숙청이 아니라 노선의 선점으로 받아쳤다. 1976년 5월 로푸 두 나시멘투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해 여러 양자 협정을 맺은 데 이어, 10월 7일부터 13일에는 네투 자신이 모스크바를 찾아 20년짜리 ‘우호협력조약’에 서명했다. 그리고 열흘 뒤인 10월 23~29일, MPLA 제3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노선으로 채택하고 1977년 말까지 ‘노동계급의 전위당’을 세우기 위한 제1차 대회 소집을 결정했다. 전원회의 직후 이코 카레이라가 남긴 말이 이 결정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준다. “MPLA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다.”
즉 1976년의 사회주의 노선 채택은 소련의 이념에 대한 깊은 확신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소련의 후원을 놓고 벌어진 당내 경쟁의 산물이기도 했다. 알베스가 모스크바의 ‘정통’을 독점하려 하자, 네투는 조약과 전원회의 결의로 그 정통의 자리를 스스로 차지했다. 이 교환의 대가는 분명했다. 소련은 1977년 5월 알베스파의 쿠데타 때 중립을 지켰고, 쿠바군은 네투 편에 섰다. 그렇게 해서 얻은 노선의 통일이, 그해 말 제1차 대회에서 MPLA-노동당(PT)으로 이어졌다.
누가 ‘인민권력’의 주인인가: 니티스타의 반란과 숙청
1977년 5월의 충돌은 독립 직후부터 자라온 세대·계급·인종의 균열이 무장 반란으로 터진 사건이었다. 내무장관 니투 알베스를 중심으로 한 니티스타는 루안다 무세케스(빈민가)의 ‘인민권력’ 위원회를 장악한 젊은 세대였다. 그들은 독립 투쟁을 모르는 17~27세의 신세대로, 식민지 말기 확대된 교육을 받았고 마르크스주의를 낭만적으로 수용했다. 메스티소·백인이 많은 네투 측근 지도부를 ‘신식민 부르주아’로, 흑인 다수 국가에서 과도한 권력을 쥔 ‘리즈번의 새 식민자’로 공격하며, 흑인권력·즉각적 계급투쟁을 주장했다. 1976년 5월 선거에서 투표율 10%에 불과했음에도 니티스타는 인민위원회를 장악했고, 니티스타가 임명한 내부통상부 간부들의 부패가 식량난을 일으키자 중앙위는 1976년 10월 이들을 ‘프락시오니즈무’로 규정했다. 포위된 알베스는 156쪽 분량의 「나를 변호하는 13개 테제」를 배포하며 지도부를 ‘우파·사회민주주의·마오주의’로 공격했다.
쿠데타는 세 차례 계획됐다. 5월 20일 중앙위의 회의 장소가 급히 바뀌어 무산됐고, 25일 시도도 군부 파벌의 망설임으로 중단됐다. 5월 27일 새벽 니티스타는 상파울루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를 풀고 정부 인사를 체포한 뒤 국영방송을 점거해 반란 선언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들이 대통령궁 밖에서 소집을 외치자 모인 군중은 500명에 불과했다. 루안다에 주둔한 쿠바군은 즉각 네투 편에 섰고, 이는 소련의 지원을 기대했던 알베스 자신을 당혹케 했다. 정오 무렵 군대가 시위를 해산하고 방송국을 되찾았으며, 쿠데타의 핵심인 제9기갑여단은 오후 1시 30분에 항복했다. 알베스는 그 전에 MPLA·군의 지도부 여러 명을 처형했고, 삼비장가에서는 니티스타가 MPLA 고위 간부 여섯 명을 포함한 여덟 명을 불태워 죽였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알베스는 북쪽으로 달아나 여섯 주를 걸어 고향 피리 근처에서 7월 7일 체포됐고, 이틀 뒤 군사재판을 거쳐 7월 14일 총살됐다. 뒤따른 숙청은 쿠데타 자체보다 컸다. 데이비드 버밍햄은 ‘수천 명’이 살해됐다고 적었고, 마테우스 부부의 추산은 2년에 걸쳐 약 1만 8천 명이 희생됐다. 희생자 다수는 젊은 활동가·지식인·간부였으며, 독립 투쟁을 거친 노간부 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균열은 유혈로 봉합됐다. 당원은 제1차 당대회 당시 11만 명에서 1980년 3만 1천여 명으로 줄었다. 쿠데타는 진압과 동시에 MPLA의 전위당 전환을 앞당긴 계기가 됐고, 독립이 약속한 ‘인민권력’의 가능성은 당내 숙청과 함께 오랫동안 봉인됐다.
전위당을 세운 대회: 1977년 12월, 당적을 둘러싼 마지막 다툼
1977년 12월 4일부터 10일까지 루안다에서 열린 MPLA 제1차 정기대회는 1956년 창립 이래 처음 열린 정식 대회였다. 대회는 다섯 개의 결의를 통과시켰다. 노동계급 정당 구성에 관한 결의, 1980년까지의 경제사회발전 노선에 관한 결의, 교육제도 개편 원칙에 관한 결의, FAPLA를 인민군대로 규정하는 결의, 대중매체에 관한 결의가 그것이다. 대회 마지막 날, 이미 1956년 창립 기념일이던 12월 10일에 MPLA는 ‘앙골라 인민의 전위’를 자임하며 당명에 노동당(Partido do Trabalho)을 덧붙였다. 1975년 11월 11일의 첫 헌법법이 사회주의 건설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전환은 헌법 개정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1978년 2월 7일 개정된 헌법법 제2조는 ‘MPLA-PT는 노동계급의 조직된 전위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으로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향한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도를 담당한다’고 처음 규정했다.
이 조직 전환은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1976년 10월 23~2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회의는 베를린에서 요구해 온 대회 개최를 처음 승인했다. 대회 의제 자체가 ‘노동계급의 전위당 건설과 앙골라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었고, 수십 년 가까이 소련공산당이 요구해 온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조직적 요구를 밀어낸 것은 사상적 확신이 아니라 니투 알베스의 니티스무에 대한 공포였다. 지도부는 소련 측과 니티스타의 연결을 끊어내려 했고, 그 대가로 이데올로기적 대(對)소련 담보를 제시했다. 1977년 5월 27일 쿠데타 시도가 진압되자 전환은 더 이상 연기할 이유가 없었다. 아고스티뉴 네투는 6월 11일 새 당 건설의 지침을 공식화하면서 MPLA 내부의 모든 문제는 정치국이 책임지고, MPLA와 병존하는 어떤 반대나 권력 중심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대회가 확정한 것은 전위당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에 따르는 조직 원리였다. 새 당원 규정이 마련되고, ‘맑스주의-레닌주의를 숙지하고 헌신하는’ 간부를 당과 국가의 최고 직위에 앉히는 엄격한 선별 절차가 도입됐다.
이 규정이 당의 몸집을 줄였다는 사실은 대회 기록 바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1977년 12월 대회 당시 MPLA에는 약 11만 명의 당원이 있었다. 1980년 12월의 제1차 임시대회에 제출된 보고에 따르면 재편을 거친 MPLA-PT의 당원은 3만 1,098명이었다. 3년 만에 8만 명 가까이가 당적을 잃은 셈인데, 이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5월 숙청 이후 전국 각지에서 당원 심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대회는 당적의 기준을 둘러싼 두 진영의 충돌 없이 끝나지 않았다. 해안의 혼혈 지식인 계열인 좌파는 경제계획 장관 카를루스 호샤 디롤루아를 앞세워 당과 국가의 요직은 민족·지역 비중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전위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무장관 파울루 테이셰이라 조르지는 이런 입장이 ‘민족·지역적 인구 비중이라는 기준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반대로 카테테 출신의 흑인 개신교도 계열인 우파는 아고스티뉴 멘데스 드 카르발류를 중심으로 각 민족·지역 집단의 대표성이 반영된 지도체계를 요구했고, 좌파를 ‘지식인’이라 경멸하며 이들을 무시했다. 두 진영 모두 네투에게 충성했고, 네투는 카테테의 흑인이면서 포르투갈에서 의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으며 루시우 라라·이코 카레이라 같은 혼혈 간부와도 깊은 우정을 나눴다. 그 균형 위에서 우파는 정치국 의석을 얻지 못했지만, 이들 진영은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아 대회장에서 비판을 받았고, 대회 밖에서는 ‘카테테 그룹’이라는 지역 로비로 보도되기까지 했다. 그래도 중앙위원회에서는 여러 자리를 확보하며 힘을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대회는 노동계급을 전위당의 지배적 계급으로 선언하고 당명에 ‘노동’을 새겼지만, 1977년 앙골라의 노동계급은 소수였다. 네투 스스로 ‘대다수는 농민이며, 노동계급은 소수이지만 전위의 이데올로기를 지녔기에 지도계급이 되어야 하며, 농민·혁명적 지식인·애국적 노동자와의 동맹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위당은 이렇게 좁은 기반 위에서 당적 필터를 통해 완전히 다른 두 정치 계획을 함께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좌파가 승리한 것은 용어와 강령이었고, 어느 쪽의 집권 논리가 살아남았는지는 1978년 12월 전원회의, 그리고 1980년 12월 디롤루아가 정부와 정치국에서 사임하며 드러났다.
독립이 정한 것과 정하지 못한 것: 아직도 갈리는 계산
1975년 11월 11일이 실제로 결정한 것은 두 가지였다. 포르투갈의 주권이 끝났다는 것, 그리고 그 주권을 넘겨받을 단일한 앙골라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중앙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어느 편도 승인하지 않은 채 “앙골라 국민”에게 독립을 넘겼고, 그날 세 개의 독립 선언이 나왔다. 루안다의 앙골라 인민공화국, 후암부의 민주인민공화국, 그리고 파리에서 선언된 카빈다 공화국이다. 1976년 2월 남아프리카 군대가 철수하고 FNLA가 붕괴한 뒤에야 MPLA는 아프리카통일기구, 유엔, 포르투갈과 80여 개국의 승인을 얻어 ‘실제로 존재하는’ 정부가 됐다. 반대편 정부가 국제적 인정을 얻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남아프리카의 지원이었다. 남아프리카와 함께 선 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정당성 비용을 치렀고, 이는 승인전에서 MPLA가 얻은 가장 값싼 자산이었다.
정한 것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전위당이었다. 1977년 12월 대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일당제를 제도화했고, 당원 수는 1975년 약 20만 명에서 대회 직후 3만 명으로 줄었다. 이 축소는 숙청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전위당이라는 형식 자체의 내용이었다. 전위당은 다수를 조직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수를 선별하는 방식이며, 그 선별의 기준을 정하는 권력이 곧 당권이었다.
정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참가자들이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폈다. 니투 알베스와 니티스타는 앙골라가 소련과 더 긴밀히 결합하고 소련에 군사기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네투는 비동맹, 진화적 사회주의, 다인종주의를 고수했다. 네투는 1976년 5월 인터콘티넨탈 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식 모델에 반대한다고 밝혔고, 나중에는 소련의 영구 군사기지 요구도 거절했다. 반란을 진압한 것은 쿠바 부대였지만, 1977년 8월 쿠바 군부장관 라울 카스트로가 네투를 만나 4천 명을 추가 파견한 것은 대외적으로 MPLA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한 과시였고, 국제주의적 연대가 정파 투쟁을 대신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련은 니투 알베스가 제거된 뒤 로포 두 나시멘투를 밀었고, 네투는 그를 중앙위원회에서 해임하고 총리직 자체를 폐지했다.
경제에서 무엇이 정해졌는지도 논쟁적이다. 국가부문의 확대는 계획경제로의 이행이라기보다 포르투갈인 소유주가 떠난 공장과 상업농장을 계속 가동시키기 위한 응급조치로 시작됐다. 1976년 3월 ‘국가개입법’이 사유기업의 국유화 근거를 마련했지만, 정부는 재건 부담을 인정해 민간부문과 외국인 투자를 계속 장려했다. 결과는 혼합이 아니라 뒤틀린 결합이었다. 농업은 경제활동인구의 약 75%를 고용했지만 시장 인센티브의 거부, 전쟁으로 인한 이주, 새 관료제의 무능, 농민들이 거부한 집단화가 겹쳐 대부분의 정책이 실패했고, 식량 수출국이었던 나라는 식량 수입국이 됐다. 국가가 수입과 유통을 통제했지만 수입품의 약 40%가 루안다에 도착한 뒤 목적지에 닿지 못했다. 살아남은 것은 서방 민간기업이 생산하고 팔아 준 석유였다. 1986년 국제 유가가 폭락했을 때 정부의 석유 수입은 예산 목표의 45%로 줄었고, 같은 해 국방비는 예산의 40.4%에 이르렀다. 1987년 도스산투스가 선포한 ‘경제·재정 정상화’는 “사회주의 계획 방법의 과도한 중앙집권”과 국영기업의 잘못된 경영, 부패를 스스로 지목하며 국제통화기금 가입까지 밀어붙인 조치였다. 독립정부의 경제 노선은 10년 만에 자기 부정으로 끝난 셈인데, 그 출발점이 이념이 아니라 이탈과 봉쇄라는 조건이었다는 점은 그 부정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
가장 오래 갈리는 것은 1977년 숙청의 규모다. 이코 카레이라 같은 당시 권력자들은 사망자를 약 300명으로 말했고, 국제사면위원회는 3만 명으로 추정했으며, 그보다 높은 9만 명까지 주장된다. 후대의 연구가 이 사건을 다시 연 것은 새로운 문서가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문서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1977년 MPLA가 발간한 약 65쪽짜리 책자가 남은 공식 기록의 거의 전부이며, 그 결구는 “사보타주꾼, 기생충, 투기꾼을 영원히 끝장내기 위해 혁명적 민주독재를 적용하자”이라는 정치국 성명이었다. 라라 파우슨은 증언과 기억으로 이 공백을 메우려 했고, 그 방법이 곧 논쟁의 대상이 됐다. 1977년의 사망자가 2천 명이든 9만 명이든 공포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파우슨의 반문이고, 반대편은 내전 전체의 규모와 비교해 이 사건을 부풀린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더 무거운 쟁점은 반란 자체의 성격이다. 쿠바 부대가 진압했다는 사실은 문서로 확인되지만, 그것이 제9여단의 무장 행동을 설명할 뿐 1977년 5월부터 11월까지 비밀재판으로 수만 명을 처리한 과정이나 지휘 책임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1990년 6월 일당제가 폐지되고 그해 12월 제3차 대회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렸을 때, 1975년 11월에 열린 가능성 중 무엇이 실제로 닫혔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국경전쟁과 콩고 전쟁에 얽힌 이 전쟁은 2002년까지 이어져 50만에서 80만 명이 죽고 100만 명 이상이 국내 실향민이 됐다.
결과
독립은 포르투갈 지배를 끝냈지만 통일된 권력 이양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MPLA는 군사적 승리와 국제적 승인을 확보하고 1977년 전위당으로 재편됐으며, 국유 부문과 서방 석유자본이 공존하는 경제를 운영했다. 내전과 당내 탄압은 독립의 사회적 가능성을 제약하는 장기적 부담이 됐다.
연표와 지도
- 1974.04포르투갈 정권 교체
카네이션 혁명 뒤 식민지 독립 협상이 시작됐다.
- 1975.01알보르 협정
세 해방운동의 과도정부와 독립 일정을 정했다.
- 1975.07–
08 과도정부 붕괴루안다루안다 전투와 각 세력의 이탈로 공동 통치가 무너졌다.
- 1975.11.11독립과 경쟁 정부루안다
MPLA는 루안다에서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 1976국가 승인과 사회주의 노선
MPLA 정부의 승인이 확대되고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했다.
- 1977.05당내 충돌과 탄압루안다
니투 알베스 관련 사건 뒤 광범위한 숙청이 이어졌다.
- 1977.12MPLA 노동당으로 재편루안다
제1차 당대회에서 전위당 형태를 제도화했다.
관련 인물 13명
집행 · 지휘2
참여4
1976년 10월 중앙위원회 뒤 과학적 사회주의만이 유일한 노선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계획경제를 설계한 이론가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디롤루아1939–19961977년 12월 대회에서 전위당과 사영 부문 철폐를 밀어붙였고 1978년 네투의 양보에 반발해 사임했다.
외무장관이자 좌익 분파 핵심파울루 조르지1934/1929–2010당과 국가의 요직은 민족·지역 인구가 아니라 이념적 전위 기준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안다에서 FNLA에 맞선 쿠바 장군아르날도 토마스 오초아 산체스1930–19891975년 앙골라 루안다에서 FNLA에 맞서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