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1979

민주캄푸치아와 1979년 정권 교체

전쟁에서 승리한 크메르루주는 왜 강제이주와 대규모 폭력을 통치·생산의 수단으로 삼았으며, 1979년에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1975년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한 뒤 민주캄푸치아 정권은 도시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강제노동·식량 통제를 시행했다. 처형·박해·기근·질병으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1970~1975년: 내전과 혁명세력의 확대

1970년 론 놀 세력이 노로돔 시아누크를 축출한 뒤 내전은 베트남 전쟁과 더욱 긴밀하게 얽혔다. 시아누크가 크메르루주와 연합하면서 왕에 충성하던 농촌 주민 일부도 반정부 운동에 가담했다. 미군의 폭격과 지상전, 주민의 이주, 크메르 공화국의 위기는 혁명세력의 확대가 일어난 전쟁 환경이었다. 이 배경은 이후 지도부가 선택한 강제정책의 책임을 대신 설명하거나 면제하지는 않는다. 근거 1 · 근거 2

1975년 4월: 승리 직후의 강제이주

크메르루주는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을 점령한 뒤 주민을 도시에서 내보냈다. 병원 환자와 노인·어린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충분한 식량과 의료 없이 이동해야 했다. 새 권력은 피난과 생산 재배치를 내세웠지만 주민에게 이동을 거부할 자유는 없었다. 캄보디아 특별재판소의 사건 002/01은 이러한 초기 강제이주와 뒤이은 이주, 투올 포 츠레이의 처형을 구체적인 범죄 사실로 다뤘다. 근거 3 · 근거 4

재판에 참여한 아운 팔리의 증언은 어린 시절 총을 든 병력에 의해 프놈펜을 떠나고 이후 노동과 굶주림을 겪은 경험을 전한다. 이런 증언은 지도자의 연설이나 생산 목표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변화의 의미를 보여 준다. 가족과 주거, 식사와 이동의 결정권을 잃는 일이 체제 전환의 일상적 경험이었다. 근거 5

강제 집산과 생존의 위기

민주캄푸치아는 화폐와 통상적인 시장교환을 폐지하고 농업 생산과 배급을 집단 조직 아래 두었다. 도시 출신의 이른바 새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의심받았고 노동·배급에서 차별을 겪었다. 높은 생산 목표와 관개공사에 노동력이 강제로 동원되는 동안 식량 부족과 질병, 처벌의 위험이 겹쳤다. 이를 단순히 계획경제의 한 유형으로만 분류하면 생산을 통제한 폭력과 주민의 선택권 박탈을 지워 버리게 된다. 근거 6

앙카르와 당 지도부, 숙청의 확대

주민에게는 앙카르, 즉 조직의 명령으로 제시됐지만 그 뒤에는 폴 포트와 누온 체아 등 캄푸치아공산당 지도부 및 지역별 간부 체계가 있었다. 중앙과 지역의 권력관계, 내부의 불신은 숙청으로 이어졌고 S-21 같은 보안시설은 구금·고문·처형의 거점이 됐다. 베트남계 주민과 참족 등 특정 집단에 대한 박해도 벌어졌다. 모든 사망을 같은 법적 범주로 묶기보다 처형·강제노동·굶주림과 집단 표적화의 구체적 경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근거 7 · 근거 4

1978~1979년: 베트남과의 전쟁과 정권 붕괴

국경 공격과 양국의 적대가 격화하고 크메르루주 내부에서도 이탈이 발생했다. 1978년 말 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반대세력과 함께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고 1979년 1월 7일 프놈펜을 장악했다. 헹 삼린을 앞세운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크메르루주의 중앙 통치는 끝났다. 그러나 크메르루주가 국경 지역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중국·소련 및 주변국의 경쟁이 개입하면서 해방, 외국군 주둔, 주권 문제에 대한 상반된 해석이 이어졌다. 근거 8 · 근거 7

재건과 책임 규명: 두 체제를 구분하기

새 정부는 파괴된 행정·교육·의료와 식량 공급을 복구해야 했다. 1979년 이후 경제에는 국가 부문뿐 아니라 가족 단위 생산과 시장교환, 협동적 노동 조직이 함께 존재했다. 이는 앞선 시기의 화폐 폐지와 강제 집산을 그대로 지속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 피해와 인력 상실, 국제적 고립 및 외부 지원 의존은 재건의 조건을 제약했다. 근거 9

훗날 캄보디아 특별재판소는 강제이주와 보안시설·노동현장, 강제결혼 및 특정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 혐의를 나누어 심리했다. 사건 002/02의 항소심은 2022년에 끝났다. 사건을 배우는 목적은 지도자의 노선 변화만 외우는 데 있지 않다. 명령을 내리고 집행한 조직, 피해를 입은 사람들, 증거를 통해 확인된 범죄를 함께 살피는 데 있다. 근거 3 · 근거 10

기근과 고립,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쟁

정권 교체가 폭력을 멈추었지만 식량 위기는 곧바로 뒤따랐다. 후퇴하는 크메르루주군이 벼 저장고에 불을 질렀고, 해체된 집산 체제 아래 경작이 끊기면서 1979년 하반기부터 기근이 번졌다. 구호 기구들은 1980년까지 최대 250만 명이 아사 위험에 놓였다고 추산했다. 새 정부는 모든 구호 물자가 프놈펜을 거치도록 요구했고, 미국·중국·아세안이 인민공화국 승인을 거부하면서 유엔 구호 기관도 국내 활동을 막혔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태국 국경의 ‘육교’ 작전으로, 구호 단체들이 1979년 12월부터 1980년 9월까지 약 15만 톤의 쌀과 종자를 국경의 난민촌을 통해 분배해 광범한 기근을 막았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그러나 프놈펜 정부를 우회한 이 구호는 암시장을 키우고 크메르루주를 포함한 반정부 세력에 식량이 흘러들어간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국제 정치는 기근과 함께 움직였다. 1979년부터 크메르루주는 민주캄푸치아라는 이름으로 유엔 의석을 계속 차지했고, 시아누크와 소 산은 크메르루주와의 연합에 고민하면서도 중국의 무기와 외교 지원 없이는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82년 6월 셋은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를 결성했는데, 시아누크가 대통령, 키우 삼판이 외무 담당 부통령, 소 산이 총리를 맡았다. 이로써 국제 사회에서 정통 정부로 대접받는 쪽은 프놈펜이 아니라 국경의 망명 정부였고, 원조의 대부분은 국경 난민촌으로 흘렀다. 지상에서는 전쟁이 건기와 우기의 리듬을 탔다. 중무장한 베트남군이 건기에 공세를 펼치면, 중국이 태국을 경유해 무장시킨 유격대가 우기에 주도권을 잡았다. 베트남군 사령관 레 득 안이 설계한 K5 계획은 태국 국경 전체에 참호와 철조망, 지뢰밭을 깔아 침투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농민의 반발을 샀고 열대림을 훼손했다. 새 정권은 1979년 9월 왓 우날롬에서 승려 일곱 명을 다시 구족계시켜 불교 승가의 복원을 시작했고, 파괴된 학교·병원·행정을 거의 무에서 다시 세워야 했다. 크메르루주의 극단적 집산제에 지친 농민들은 협동 영농을 거부했고, 당은 1980년대 중반부터 사실상 가족 경제를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지막 판결: 집단살해가 성립한 대상은 누구였는가

2022년 9월 22일, 크메르루주 특별재판소(ECCC) 대법원부가 키우 삼판의 항소를 기각하며 2018년 1심 유죄를 확정했다. 대량학살, 인도에 반한 죄, 제네바협약 중대 위반이 모두 인정됐고, 이 판결은 재판소의 마지막 판결이 됐다. 1979년부터 이어져 온 ‘민주캄푸치아 시절의 책임’을 묻는 사법 절차가 40년 넘게 흐른 뒤 여기에서 닫힌 것이다.

그러나 판결의 핵심은 무엇이 유죄로 남았고 무엇이 성립하지 않았는지에 있었다. 항소심까지 살아남아 확정된 집단살해(제노사이드) 유죄는 단 하나, 베트남계 민족 집단에 대한 것이었다. 키우 삼판은 ‘급속한 사회주의 혁명’을 공동 목적으로 한 공동범죄집단(JCE)의 참여자로 규정됐고, 이 집단이 특정 집단(참족, 불교도, 구 크메르공화국 관료, 베트남계)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판단됐다. 폴 포트의 2인자 누온 체아는 2018년 참족과 베트남계에 대한 집단살해로 함께 유죄를 받았지만, 항소심 판결이 나오기 전인 2019년 8월에 사망했다. 그의 변호인은 판결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부는 사망이 1심의 사실 인정을 무효로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여기에 의미를 둔 학계의 평가는 판결이 집단살해를 소수 민족 집단에 한정한 점을 짚었다. 캄보디아인들이 일상에서 쓰는 ‘집단살해’라는 말(프롤라이 푸치사스, 민족 또는 국민의 말살)은 크메르루주에게 고통받은 캄보디아인 전체를 가리키는데, 재판소는 집단살해 방지 협약의 좁은 정의를 택해 ‘보호 집단’이 준전체 인구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재판관 유 오타라도 별개의견에서 이 협소한 접근이 1975년 당시 캄보디아 민족 집단의 핵심을 구성한 종교·지도자·사회문화적 특징의 말살 가능성을 놓쳤다고 비판했다. 1979년 인민혁명재판은 폴 포트와 이엥 사리를 궐석으로 단죄하며 더 넓은 의미의 집단살해를 썼던 것과 대비된다.

마지막 장면은 세 가지 유죄로 막을 내렸다. 사건 003·004(메아스 무트, 임 팃, 아오 안)는 캄보디아 측의 지속적 반대로 재판에 이르지 못했고, 재판소는 남은 고위 생존자가 없자 2022년 12월 업무를 종료했다. 앰네스티인터내셔널은 판결 당일 ‘책임 추궁에는 만료 시한이 없다’고 했고, 동시에 캄보디아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역사책임을 법정 언어 안에 다 담을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 판결의 결론이었다.

확정된 것과 확정되지 않은 것: 학계와 법정이 아직 갈리는 지점

1975~1979년 캄보디아에서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갈리는 것은 규모도, 성격도, 누가 그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는가도 아니다. 무엇을 세는가와 무엇을 법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다.

먼저 규모. 1979년 이후 널리 쓰인 약 200만 명이라는 수치는 그 자체로는 방법론이 아니라 정치적 주장에서 출발했다. 1979년 새 정권이 세운 인민혁명재판소는 폴 포트와 이엥 사리를 집단살해죄로 재판하면서 당시 집단살해협약의 정의와 다른, 오늘날의 반인도적 범죄에 가까운 개념을 적용했다. 즉 처음부터 ‘200만’은 법정 수치가 아니라 국가 건설의 언어였다.

학술적 추계는 나중에 따라붙었다. 인구통계학자들은 1975년 인구 약 780만을 기준선으로 삼아 정상 사망률을 넘는 초과사망을 계산한다. 이 방식으로는 전국 단위 추계가 대략 170만에서 190만 사이에 모이는데, 이는 1975년 인구의 21~24%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중요하다. 초과사망에는 처형뿐 아니라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함께 들어간다. 반대로 직접적 폭력사만 따로 세면 그 수는 훨씬 작아지고, 그중 80% 이상이 남성이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골라 인용하는 관행은 이 구분을 지운다.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더 오래 끌었다. 1979년 직후 현장에 들어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크메르루주의 살인이 ‘중앙의 명령’인지 ‘동원된 농민군의 통제되지 않은 폭력’인지를 두고 갈렸다. 후자의 대표적 주장은 살인이 폭력적인 농민군의 자발적 과잉이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1990년대 이후 크메르루주 내부 문서, 특히 내부 보안기구의 지시 문건이 공개되면서 크게 약해졌다. 살인이 전국 단위로 지시되고 기록된 체계적 사업이었다는 증거가 축적된 것이다. 다만 이는 폭력이 전적으로 중앙 통제 아래 있었다는 뜻은 아니며, 문서는 지시와 실행 사이의 간극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2022년 9월 22일 특별재판소 상급심이 키우 삼판의 항소를 기각했을 때, 법적으로 확정된 것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좁았다. 재판부는 그를 2018년 유죄 판결대로 전쟁범죄·반인도적 범죄·집단살해죄에 대해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집단살해죄가 성립한 대상은 베트남계 소수민족이었다. 기소 단계에서 조사판사들은 캄보디아 다수 민족에 대한 집단살해 가능성조차 검토하지 않았고, 그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재판관 유 오따라는 소수의견에서 이런 접근을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며, 1975년 당시 캄보디아 민족 집단의 존속에 본질적이었던 사람들이 파괴 대상이 되었는지를 물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정은 확정했고, 그 확정의 범위는 사상자 대부분을 담지 못했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하나 풀어야 한다. 2022년 판결을 두고 ‘민주캄푸치아 지도자가 집단살해로 유죄가 확정됐다’고 요약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유죄는 확정됐으나 그 집단살해죄의 피해자는 약 2만 명으로 추산되는 베트남계였고, 같은 기간 사망한 캄보디아 다수는 약 150만으로 추산된다. 법정이 다수 민족에 대한 집단살해를 심리하지 않은 것은 사면이나 정치적 거래가 아니라 기소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살해·절멸·노예화·추방·고문을 모두 인정했지만, 이를 규율할 죄명을 집단살해로 붙이지 않았다. 이 차이는 법률가에게는 결정적이고 피해자 다수에게는 낯설다. 오히려 캄보디아의 대중적 언어에서 집단살해는 캄보디아 민족 전체에 대한 말살을 뜻하며, 집단살해가 법적으로 인정된 소수민족 피해자들조차 자신의 경험과 다수 민족의 경험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정말로 매듭지은 것은 무엇인가. 첫째, 1979년 1월 7일이 크메르루주 중앙 통치를 끝냈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 날짜가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서도 ‘누가 정권을 잡았는가’와 ‘무엇이 진상 규명되었는가’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크메르루주는 1979년 이후에도 유엔 의석을 유지했다. 1979년 9월 유엔총회는 민주캄푸치아의 대표 자격에 이의를 제기한 시도를 71대 35(기권 34)로 물리쳤고, 의석은 1982년 시아누크·손산 세력과의 연립정부 구성 뒤에도 1993년까지 크메르루주 계열에 남았다. 대규모 살상이 국제적 승인을 즉각 철회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이 사건이 남긴 냉정한 교훈이다.

마지막으로 확정되지 않은 채 남은 것. 프놈펜에서 재판이 열린 16년 동안 유죄 판결은 세 건이었고, 재판관사들이 조사한 사건 네 건은 심리 없이 종결됐다. 판결은 그 자체로 피해자에게 완전한 답이 아니다.

결과

민주캄푸치아는 도시 주민의 강제이주와 강제노동, 처형·박해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낳았다. 1979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 반대세력의 승리는 크메르루주의 중앙 통치를 끝냈으나 전쟁을 즉시 종식하지는 못했다. 새 인민공화국의 재건과 민주캄푸치아의 강제 집산 체제는 구별해야 하며, 피해자의 경험과 확인된 범죄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연표와 지도

프놈펜 1 프놈펜 2 프놈펜 4 프놈펜 5 크메르루주 특별재판소 3 베트남군 · 프놈펜 진격 베트남군3
  1. 11970.03캄보디아베트남
    시아누크 축출

    정권 교체 뒤 내전과 주변 전쟁의 결합이 심화됐다.

  2. 21975.04.17캄보디아베트남
    프놈펜 점령과 강제이주

    크메르루주가 승리한 뒤 주민을 도시에서 내보냈다.

  3. 1975–1978캄보디아베트남
    강제 집산·박해·숙청

    생산 동원과 정치적 폭력이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낳았다.

  4. 31978.12캄보디아베트남
    베트남군의 대규모 공격

    베트남군과 캄보디아 반대세력이 진격했다.

  5. 41979.01.07캄보디아베트남
    프놈펜 정권 교체

    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졌으나 전쟁은 계속됐다.

  6. 1979 이후캄보디아베트남
    재건과 장기 전쟁

    행정·생산·교육 복구가 무력 충돌 속에 진행됐다.

  7. 52022.09캄보디아베트남
    사건 002/02 항소심 종결

    특별재판소가 이 사건의 절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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