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의 군정과 사회주의 제2공화국
경제·문화적 탈식민화 요구는 어떻게 군정을 거쳐 라치라카의 제2공화국으로 이어졌는가?
1972년 이후 마다가스카르의 군사정부는 프랑스와의 관계 및 식민지에서 이어진 경제구조를 재검토했다. 정권 내부의 방향 차이와 지도부 교체가 이어졌다.
독립 뒤에도 남은 프랑스와의 관계
1960년 독립 뒤 필리베르 치라나나 정부는 프랑스와 경제·군사·교육 협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연속성은 초기 안정의 수단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이 누구의 생활과 권력을 바꾸었는지에 대한 비판을 불렀다. 지역별 빈곤과 불평등, 교육 기회의 차이는 수도의 학생운동과 농촌의 불만을 연결했다. 제1공화국의 위기는 단순히 친서방 지도자와 사회주의 지도자의 대결보다 넓은 사회적 배경을 가졌다. 근거 1 · 근거 2
1972년 시위와 군부로의 권력 이양
1972년 학생들은 프랑스 중심의 교육과정과 협정, 제한된 중등교육 접근을 비판했다. 체포와 발포는 시위를 확대했고 노동자·공무원 등 다른 집단도 합류했다. 치라나나는 5월 가브리엘 라마난추아 장군에게 권한을 넘겼다. 군대가 즉각적인 위기 수습의 대안으로 등장했지만 경제·지역·사회적 갈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근거 1
1975년의 지도부 교체와 라치라카
군정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조정했지만 내부 갈등 속에 흔들렸다. 1975년 2월 리샤르 라치만드라바에게 권력이 넘어갔으나 그는 곧 암살됐다. 라치만드라바는 지역 공동체 포코놀로나에 기반한 통치 구상을 가졌지만 라치라카의 사회주의 제2공화국을 직접 세운 지도자는 아니다. 이후 군 지도부는 6월 디디에 라치라카를 국가원수로 선출했다. 근거 1 · 근거 3 · 근거 4
1975년 12월 국민투표는 라치라카의 집권과 새 헌정 질서, 사회주의 혁명헌장을 승인했다. 헌장은 국민적 자립, 계획적 발전, 지방 공동체의 재편을 내세웠다. 변화의 주도권은 혁명최고평의회와 대통령에게 있었으며, 대중 참여를 강조하는 언어와 위에서 설계하는 국가개조가 함께 존재했다. 근거 3
경제적 탈식민화와 국유 부문
정부는 프랑스 자본의 영향력이 큰 금융·운수·유통·산업 부문에서 국가 소유와 통제를 확대했다. 민간기업이 남은 곳에서도 가격과 이윤 송금에 규제를 두었다. 국유화는 외국 소유를 국내 국가 소유로 바꾸는 조치였으며, 노동자나 지역 주민이 기업의 결정을 직접 내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농촌 협동조합과 투자 확대도 계획의 일부였지만 대부분 주민의 생계는 여전히 소농업에 의존했다. 근거 2
혁명전선과 제한된 정치적 참여
1976년 조직된 AREMA는 유일한 합법 정당이라기보다 혁명수호민족전선 안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진 집권당이었다. 다른 정당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혁명헌장의 원칙을 받아들여야 했다. 따라서 제2공화국을 정당이 하나뿐인 체제로 설명하는 것도, 제한 없는 경쟁정치로 설명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언론 검열과 반정부 시위 진압은 국가가 허용하는 참여의 경계를 드러냈다. 근거 3
개발의 기대와 후속 경제위기
1970년대 후반 대규모 공공투자는 자립적 발전을 기대하게 했지만 생산과 생활수준의 개선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외채 부담이 커졌다. 이후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과의 협상, 시장 운영과 민간투자 확대가 진행됐다. 이는 국가개발을 위해 동원한 외부 자금이 다시 정책 선택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돌아온 과정이었다. 1991~1993년 정치적 전환은 이보다 뒤의 사건이며 1975년의 건국과 구분해야 한다. 근거 2 · 근거 3
단일당이 무너진 자리에 세워진 여섯 정당의 전선
라치라카 일파는 처음에 1972년 혁명을 이끈 좌파 정당들을 하나의 당으로 묶으려 했으나 교섭은 결렬됐다. 그 대신 1976년 3월 아레마(AREMA, 말라가시혁명의 전위)가 라치라카를 서기장으로 삼아 정권당으로 발족했다. 아레마는 단일당이 아니었다. 혁명헌장(붉은 책)을 승인한 정당만 가입할 수 있는 혁명수호민족전선(FNDR)의 우산 아래 놓인 여러 정당 가운데 가장 강한 하나였고, 선거에 출마하려면 이 전선에 소속돼야 했다. 목사 출신 안드리아만자토의 AKFM과 남부의 몽자 자오나가 이끄는 MONIMA 같은, 제1공화국 때부터의 반대파를 망라한 틀이었다. 라치라카는 원칙 논쟁을 할 ‘까다로운 인사들’을 혁명평의회(CSR)에 올려앉히고, 아레마가 장악한 내각이 실무를 맡는 구도를 잡았다.
1977년 3월부터 6월까지 잇따라 치러진 지방·주의회·국민인민의회 선거에서 아레마는 압승했다. 1만1천4백 개 마을공동체(fokonolona)의 7만3천 석 가운데 90%, 6개 주의회 232석 중 220석, 국민인민의회 137석 중 112석을 차지했고, 18개 부처 중 16개를 아레마가 가져갔다. 이 압승의 대가는 정통성의 상처였다. 몽자 자오나는 선거를 부정선거라 고발하고 무효를 요구한 뒤 6월에 MONIMA를 전선에서 빼냈고, MFM은 반대로 7월 30일 라코토니리나의 주도로 전선에 들어왔다. 아레마의 우위는 대중 호소가 아니라, 라치라카가 직접 정치국 인선을 좌우하고 관직·지역 후견망을 장악한 데 기초했다. 제1공화국의 집권당 PSD처럼 아레마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느슨한 연합이었고, 이 분열은 훗날 시장파와 대통령파의 갈등으로 터져 나온다. 패권의 기계는 1977년에 이미 완성됐으나, 그해 9월 안타나나리보에서 식량·생필품 부족을 항의하는 시위가 터지면서 새 체제의 지지 기반이 약하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무엇이 끝났고 무엇이 남았는가
1972~1975년이 확정한 것은 셋이다. 첫째, 제1공화국과 그 배후의 1960년 협력협정 체계가 결정적으로 무너졌고, 둘째, 제2공화국의 헌법·혁명헌장·AREMA·혁명전선이라는 제도 골격이 1975년 말까지 한꺼번에 세워졌으며, 셋째, 그 제도의 후견인이 라치라카 개인으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남은 불일치는 더 컸다. 1972년 4~5월의 운동이 실제로 요구한 것과 군부가 만들어낸 것 사이에는 갭이 있었다. FAEM 사무총장으로 파업위원회를 이끌었던 미셸린 라볼로나리소아는 훗날 ROAPE와의 대담에서, 운동의 목표는 집권이 아니라 1960년 협력협정의 폐지를 통한 ‘제2의 독립’과 말라가시어·말라가시 철학에 뿌리내린 사회였는데 ‘이행은 1972~1975년 군사정권의 국민투표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술회한다. 운동 다수는 애초부터 군사정권 수립 제안에 반대했고, 1972년 9월 자이카베 인민대회에서 토지 반환 등 결의를 쏟아냈지만 실행은 ‘제1정권과 같은 정치를 한’ 군부에 맡겨졌다. 즉 정착된 것의 대부분은 운동의 원안이 아니라 군부가 선택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역사가들이 아직 갈리는 지점도 이 갭에 걸쳐 있다. 한쪽 평가는 라치라카 시대를 경제파탄과 ‘희생된 세대’의 원인으로 본다. 말라가시화와 교육 개혁이 준비·재원 없이 추진되면서 1970~90년대에 학교를 다닌 세대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국유화가 촉발한 자본유출 뒤 정부는 비생산적인 투자에 과도하게 빌려 부채가 급증했다. 세계은행 기준 빈곤인구 비율은 1980년 46.1%에서 1992년 70%로 올랐다. 다른쪽은 그 수치가 전환의 원인을 1972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려 잡는다. 국민소득은 이미 1971년 정점 858달러에서 1975년 762달러로 내려앉아 있었고, 그 하락의 원인은 1973년 유가충격, 정치 불안정, 그리고 국유화 이전부터 진행된 자본유출이었다. 라치라카가 악화시킨 것인지 악화된 상황을 물려받은 것인지는 자료에 따라 답이 갈린다. 반소도, 무비판적 미화도 아닌 중간에서 확인되는 것은 한 가지다. 1972년이 열어젖힌 탈식민화라는 과제를, 운동이 아니라 군부가 인수했고 그 인수 자체가 결과의 방향을 틀었다는 점이다.
결과
1972~1975년의 전환은 프랑스와의 기존 관계와 제1공화국의 권력구조를 흔들고, 국가계획과 경제적 탈식민화를 내세운 제2공화국을 만들었다. 다만 혁명헌장을 승인하는 제한된 정당연합은 자유로운 다당제와 달랐다. 국유화·투자 확대의 기대는 생산·부채 문제와 충돌했고 이후 경제개혁과 정치적 전환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