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
홀로도모르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약 390만 명이 아사한 재앙이다. 직접적 원인은 스탈린 지도부가 강제 집단화와 가속화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설정한 감당할 수 없는 곡물 공출 할당량이었다. 1931년 수확량이 급감했음에도 공출 목표는 오히려 유지되었고, 1932년 가을부터는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같은 크렘린 특사들이 직접 파견되어 곡물을 샅샅이 수탈했다. 공출에 실패한 마을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경제 봉쇄를 당했고, 1933년 1월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국경을 봉쇄해 굶주린 농민들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했다. 기근은 소련 전체 곡창지대를 덮쳤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희생이 가장 컸으며, 소비에트 당국은 1987년 말까지 기근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