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5월 10일 로잔 호텔 세실 식당. 저녁 식사 중 백계 장교 모리스 콘라디가 다가가 권총을 쏘았다. 콘라디는 웨이터에게 리볼버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전체를 망쳤다… 이것은 온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보롭스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P. 오를롭스키' 등 여러 필명으로 당 기관지에 날카로운 문학비평과 정치 팸플릿을 발표했다. 1917년 말 스칸디나비아 3국 주재 외교대표로 임명되며 혁명 러시아의 첫 외교 창구를 열었고, 1921년부터 이탈리아 전권대표로 활동하며 제노바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로잔 회담 중 백계 망명 장교에게 암살당했으며, 범인에 대한 스위스 법정의 무죄 판결은 소련-스위스 국교 단절로 이어졌다.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귀족 가문 출신의 망명 사회주의자로, 1918년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에스토니아·튀르키예·이란·아프가니스탄과 연이은 조약으로 혁명 러시아의 외교적 고립을 벗겨냈고,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독일과 손을 잡으며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돌파했다. 13년간 소비에트 외교의 제도적 토대를 세운 뒤 병과 과로 속에서 1930년 막심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1917년 10월 25일 밤, 스몰니. 네바 강에서 오로라호의 함포가 울렸다. 레닌이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콜론타이는 훗날 이렇게 썼다. «내 생애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
장군의 딸로 태어나 세계 최초의 여성 정부 각료(복지인민위원)가 되었고, 자유연애론과 가사노동의 사회화 주장으로 당 안에서도 논쟁을 일으켰다. 노동자 반대파에 섰다가 외교관으로 「명예 유배」되었는데,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대사관저가 그녀를 대숙청에서 살렸다. 옛 볼셰비키 가운데 드물게 침대에서 죽었다.
1935년 국제연맹 총회 연단에서 리트비노프는 두 단어로 자신의 외교 철학을 요약했다: "Мир неделим" —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한 지역의 평화만으로는 안전할 수 없으며, 가까운 이웃이든 먼 이웃이든 모두의 평화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 구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 외교관으로, 1930년대 외무인민위원 시절 국제연맹에서 반파시즘 집단안보 노선을 주도하고 1933년 미소 국교 정상화를 이끌었다. 파시즘에 맞선 광범한 동맹을 추구했으나, 독일과의 협상으로 방향을 틀려던 스탈린은 1939년 5월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유대인 외무장관의 퇴진 자체가 외교 노선 전환의 신호였다. 독소전쟁 발발 후 복권되어 주미 대사와 외무부인민위원으로 연합국 외교에 복무했다.
멘셰비키에서 소련 최장수 대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브라질까지, 6개국을 횡단한 혁명 외교관
1940년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1919년 이래 뚱뚱하고 수염 난 야코프 수리츠는 아프가니스탄, 터키, 독일과 국제연맹 논쟁에서 빛나는 기록을 쌓은 소련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 191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합류한 후 덴마크·아프가니스탄·노르웨이·터키·독일·프랑스·브라질 등 7개국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특히 1923년부터 11년간 터키 대사로 재임하며 아타튀르크와 긴밀히 협력,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1925)을 체결했고 앙카라에 최초의 대사관을 건립했다. 1934년 베를린 주재 대사로 부임해 나치 집권 초기 독소 경제 관계를 관리했으며, 1937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단치히 위기와 겨울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국제연맹 외교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기 소비에트 외교가 당파적 아마추어에서 전문 외교기구로 변모하는 전 과정을 관통한다.
상세 이력 보기
1902유대인 노동총동맹(분트) 가입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분파
1907–1910혁명 활동으로 체포, 토볼스크현 유배
1910–1917독일 망명, 하이델베르크·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법학 수학
1917러시아 귀국, RSDLP(b)에 합류
1918–1919덴마크 주재 소련 외교사절단 부대표
1919–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아프간 조약 기초
1920–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투르키스탄 위원회 위원, 중앙아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
1922–1923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대표
1923–1934터키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 체결 (1925), 앙카라 대사관 건립 (1926)
백악관 리셉션에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트로야놉스키 씨가 달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면, 신사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믿겠습니다."
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는 1933년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후 초대 주미 소련 전권대표(대사)로 부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와의 협력 기반을 닦은 소련 외교관이다. 세습 귀족 출신이자 차르 포병 장교였던 그는 1904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가 1914년 멘셰비키로 전향, 1918년 멘셰비키 중앙위원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2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스탈린의 대외무역·외교 라인에 편입되었다. 주일 전권대표(1927~1933)를 거쳐 워싱턴에 부임한 그는 1935년 미소 무역 협정 체결을 주도했고, 스탈린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대미 협력의 필요성을 누차 건의했다. 그의 아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 또한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1947년 9월 유엔 총회 연단에서 비신스키는 엘리너 루스벨트와 조지 마셜이 앉은 미국 대표석을 향해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전락시켰다고 맹비난했다.
멘셰비키 출신 법학자로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모스크바국립대 총장(1925~1928)을 지냈다. 소련 검찰총장(1935~1939)으로서 모스크바 공개재판에서 국가검사를 맡아 '자백이 증거의 여왕'이라는 이론을 법정 관행으로 만들었으며, 《소련법에서의 사법적 증거 이론》(1947년 스탈린상)으로 소비에트 형법 이론의 기초를 닦았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의 소련 대표단을 실질적으로 지휘했고, 외무장관(1949~1953)으로 유엔 무대에서 스탈린 말기의 강경 외교를 대표했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멘셰비키에서 소련의 대영제국 외교관으로, 전향과 회유 속에서도 세계대전 외교의 중심에 선 인물
1918년 11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가 혁명을 구하려는 마지막 영웅적-절망적 시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썼다. 2년 후 그는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이자 역사가. 1932년부터 11년간 영국 대사로 재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외교의 핵심 창구로 활약했고, 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으로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종전 후 외무인민부위원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고 독일 배상 문제를 주도했다. 그의 런던 외교 일기는 전간기 및 전시 소련 외교의 내막을 담은 독보적 사료로 평가된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런던 아르코스 사무소 급습 이튿날, 로젠골츠는 7쪽 분량의 항의각서를 영국 정부에 제출하며 증거를 요구했지만, 이틀 뒤 영국 내각은 지하 암실에서 압수한 문서를 공개하며 단교를 선언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활약하고 공군 총책임자로 소련 공군을 조직했으며, 이후 런던 주재 대리대사로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서 첫 5개년 계획 시기 소련의 수출입을 지휘했으며, 동시에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좌익 반대파 출신으로 스탈린 체제로 편입된 복잡한 궤적을 남겼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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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으로 선출; 보험대리인으로 일하며 지하활동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1922–1924공군 총책임자 — 독일군과 비밀 군사협상 주도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영소 단교에 직면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1937–1938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아내 폴리나가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간 4년 내내,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 분의 식탁을 차리게 했다. 훗날 그가 남긴 말 —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볼셰비키 지하신문 『프라우다』 창간부터 1962년 출당까지 56년: 스탈린의 가장 오래된 측근으로서 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을 11년간 지내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지휘했다. 외무인민위원으로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하고 마셜 플랜을 거부했으며, 전시에는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과 유엔 창설을 주도했다. 별명 「돌엉덩이」는 그 완고함에 레닌이 붙였다고 전한다. 아내가 수용소로 끌려갈 때도 스탈린 곁을 지켰고,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해 몽골 대사로 좌천되었다. 96세로 죽는 날까지 스탈린 시대를 후회하지 않았다.
7월 26일 슈누레와의 만찬에서 '대화가 너무 멀리 나아가기 시작한다고 느꼈다'고 일기에 적었을 때까지, 이 비밀 통로의 주인공은 모스크바의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다.
귀족 집안의 문인으로 출발해 소련 외교관이 된 인물.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언론·외교를 오갔고, 1928년에는 소련 최초로 아랍 국가인 예멘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1939년 봄 베를린 대리대사가 되어 바이츠제커·슈누레·리벤트로프와 독소 접근의 신호를 주고받은 일이며, 7월 29일 몰로토프의 지시를 받고 소련의 태도 변화를 전한 뒤 조약 직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1940년 체포된 채 수용소에서 죽었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1958년 1월 27일 워싱턴에서 자루빈은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과 미국이 영화, 음악, 과학, 스포츠 교류를 정부 간 협정으로 제도화한 것은 양국 관계 사상 처음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1944년부터 1958년까지 캐나다, 영국, 미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초기 냉전기 소련 외교의 핵심적인 대서양 창구였다. 1958년 1월 27일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미소 문화·기술·교육 교류 협정」(레이시-자루빈 협정)에 서명하여 양국 간 최초의 정부 간 문화교류 틀을 수립했으며, 이 협정은 소련 붕괴 시까지 연장되며 볼쇼이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냉전 문화외교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복귀한 지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루스벨트는 각료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소련 대사 우만스키가 완고하고 비협조적이며 금 보유고로 결제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자, 화가 난 루스벨트는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불렀다."
콘스탄틴 우만스키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주미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관으로, 당시 워싱턴 최연소 대사였다. TASS 특파원과 외무인민위원부 언론정보국장을 거치며 외신 검열을 총괄했고, 언론인 경력 속에 NKVD 정보 활동이 섞여 있었다는 정황이 여러 사료에서 제기된다. 주미 대사 시절 군수 물자 협상에서의 고압적 태도는 루스벨트로 하여금 각료회의에서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부르게 할 정도였다. 1943년 주멕시코 대사로 부임해 3개월 만에 스페인어를 익혀 가장 인기 있는 외교관이 되었으나, 1945년 코스타리카 부임길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그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4,004단어의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한 전개는 전 세계에서 미국 경제적 지위의 심각한 강화를 의미하며, 미국의 세계 지배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이다.'
소련 외교관이자 미국 주재 대사(1946–1947). 1946년 9월 조지 케넌의 '장전보(長電報)'에 대응하여 4,004단어의 '노비코프 전보'를 작성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 독점자본의 세계 패권 추구이며 소련이 그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은 몰로토프의 지시로 작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그의 공동 집필이었다. 냉전의 기초 문서로 평가받는 이 전보는 1990년 글라스노스트 시기까지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1943~1944년 카이로 주재 대사로 근무하며 시리아·레바논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워싱턴 대사직에서 1947년 돌연 해임된 후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처칠이 구세프에 대해 묻자, 주소 영국대사 클라크 커는 이렇게 답했다: '무례하고, 경험 없고, 교양 없는 자입니다.'
표도르 구세프는 스탈린 시대 외교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대영국 대사(1943~1946)를 지내며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모두 참가했다. 레닌그라드 법학을 전공하고 1935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한 그는, 캐나다 공사(1942~1943)를 거쳐 전시 동맹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부상했다. 영국 측은 그를 '무뚝뚝하고 경험 없는 인물'로 평가했지만,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쟁 말기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요구를 밀어붙일 강경한 외교관을 원했다. 종전 후 외무차관(1946~1952)을 지내며 냉전 초기 외교 정책에 관여했고, 1956~1962년 스웨덴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말리크는 말했다. "교전국들이 38도선에서 상호 철군하는 휴전과 정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평화를 위해 치르기에 너무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야코프 말리크는 두 차례 유엔 상임대표(1948~1952, 1967~1976)를 지낸 소련의 대표적 외교관이다. 하리코프 주 농민 가정 출신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고 당 간부를 거쳐 1937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했다. 1951년 6월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전쟁 휴전과 38도선 상호 철군을 제안해 정전 협상의 물꼬를 텄고,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안보리에서 정당화했다. 일본·영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두루 거친 말리크의 유엔 외교는 스탈린 말기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관철하는 핵심 통로였다.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을 이끌어낸 중개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시티코프가 '일본 식민정치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보다도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45~50년 북조선 국가의 실질적 설계자'라고 평가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콤소몰에서 경력을 쌓고 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1938~1945)로 부상한 소련의 군사정치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고 1944년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45년 극동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북조선에 진입했다. 1945~1948년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김일성을 집권시키고 토지개혁을 설계했으며, 1948~1950년 초대 주조선 대사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 승인을 이끌어냈다. 전황 역전 후 정보 실패로 1950년 해임·강등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노브고로드·프리모리예 당서기와 주헝가리 대사를 지내고 1964년 사망했다.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1958년 당 중앙위 정보부장 푸시킨이 흐루쇼프에게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의 위험을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말도 안 돼! 군대를 들여보내도 전쟁은 안 난다"며 그를 끊고 정보부를 해체했다.
전시 슬로바키아, 전후 헝가리, 동독,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형성기 세 수도에 차례로 대사를 지낸 경력 외교관이다. 1945년 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으로서 스탈린식 체제 이식의 주요 창구였으며, 1949–1952년과 1954–1958년 두 차례 동독 주재 대사로 재임하며 동독 국가 건설을 소련 측에서 감독했다. 1958년 신설된 당 중앙위 대외정보부장으로서 흐루쇼프에게 국제정세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가 해임되었다. 1959년 외무차관으로 복귀해 1961–1962년 라오스 중립화 제네바 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1964년 그는 유럽안보회의가 국가 안보를 보장하고, 그 장애물이 제거되면 유럽 국가들의 경제 협력이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전후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훗날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항의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침묵 끝에 75세의 그로미코가 가장 먼저 일어나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불렀다. "미소는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 28년간 '미스터 니에트'로 불리던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을 직접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28년간 외무장관: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미스터 니예트'는 안보리 20여 차례 거부권에서 비롯된 별명이었고, 그의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브레즈네프 시대 군축을 주도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1968)와 아프가니스탄(1979)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985년 3월, 최고참 보수파로서 고르바초프를 추천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을 열었다: '이 사람은 미소가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입니다.' 자신이 만든 개혁가가 여는 시대를 지켜보다 죽었다.
1953년 6월 동독 봉기 당시 정치국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자, 세묘노프는 '소련은 독일 노동자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23년간 소련 외무차관을 지내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일 정책을 거의 40년간 주무른 외교관이다. 2차대전 후 소련군정 정치고문으로 동독 수립과 베를린 봉쇄의 핵심 설계자였으며,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 당시 정치국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차관으로 서독과의 동방정책을 뒷받침하고 SALT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이끌었다. 1978년 주서독 대사로 부임해 말년까지 본에서 근무했으며,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 컬렉터로도 알려져 있다.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1962년 5월 크렘린에서 흐루쇼프가 물었다.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일까?' 알렉세예프는 회고했다.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나는 피델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을 말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시토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NKVD에 들어가 이란·프랑스·아르헨티나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다. 1959년 TASS 특파원 신분으로 쿠바에 도착해 피델 카스트로 및 체 게바라와 개인적 신뢰를 쌓았고, 1962년 5월 소련의 초대 주쿠바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흐루쇼프에게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무시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카스트로의 핵 선제타격 주장을 진정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바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1968년 8월 21일,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간 체르보넨코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무저항 전문을 이끌어냈다. 그레치코 원수의 회고: 「그 공으로 대사에게 레닌훈장을 두 개 줘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더군.」
소련 외교관으로 중소 분열기 주중 대사(1959~1965), 프라하의 봄 당시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1965~1973), 주프랑스 대사(1973~1982)를 지냈다. 1968년 8월 21일 모스크바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가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무저항 명령을 설득해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으며, 소련 지도부는 이 공로에 「레닌훈장 두 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61~1989년 CPSU 중앙위원, 5개 레닌훈장 수훈.
테헤란 회담 만찬장에서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순간 처칠이 말을 꺼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베레시코프에게, 스탈린이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자네는 밥 먹으러 온 게 아니야.'
테헤란(1943), 얄타(1945), 포츠담(1945) 회담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개인 통역을 맡아 전후 질서를 결정한 '빅3' 외교 현장을 목격한 소련 외교관. 1940~1941년 주베를린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통역을 맡았고, 리벤트로프의 대소 선전포고 현장에도 있었다. 부모의 전시 행방 문제로 외무부에서 밀려난 후 《노보예 브레먀》 부편집장과 소련의 대표적 미국학 저널 《USA: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창립 편집장을 지냈다. 주워싱턴 대사관 1등서기관(1979~1983)으로 복귀했고, 소련 붕괴 후 몬터레이 국제학연구소에서 강의하며 권력 정점에서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소련 체제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다” — 도브리닌 대사가 키신저에게 알렉산드로프-아겐토프를 설명하며, 1972년.
스웨덴 문헌학도 출신으로 타스 통신원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주재 스웨덴 소련 공사관 보좌관을 거쳐 외교 경력을 시작했다. 1961년 브레즈네프의 국제문제 보좌관이 된 이래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까지 네 명의 서기장을 연속으로 보좌하며 데탕트 시대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실무자로 활약했다.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을 직접 집필하고 미소 정상회담과 헬싱키 협정(1975년) 체결에 배석했으며, 자신의 외교 경력 중 최대 성과로 전후 유럽 국경 승인을 꼽았다. 1986년 은퇴 후 회고록 《콜론타이에서 고르바초프까지》를 남겼다.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코체마소프는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에게 전화 지시를 구했으나 둘 다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정치인·외교관으로, 1962년부터 21년간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문화·사회 정책을 총괄했고, 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의장(1966~1983)으로서 문화유산 보존 운동을 이끌었다. 1983년 동독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냉전 최전선인 동베를린에서 근무했으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켰다. 1990년 4월 동독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 총리에게 독일 통일에 관한 소련의 11개 조건을 담은 비공식 문건을 전달하며 통일 과정에서 소련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트로야놉스키가 무심히 던진 '죽는 것보다 붉은 게 낫군'이라는 한마디에, 안보리 회의장은 긴장이 풀려 웃음이 터졌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는 스탈린의 통역에서 출발해 흐루쇼프의 외교 보좌관, 주일 대사,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주중 대사를 역임한 소련의 외교관이다. 초대 주미 소련 대사의 아들로 워싱턴에서 성장한 독특한 배경을 지녔으며, 10년간의 유엔 대표 재임 중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KAL 007기 격추라는 냉전의 최대 위기에서 냉철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서방 외교가들의 존중을 얻었다. 유엔 대표직은 야코프 말리크의 후임이자 고르바초프 개혁 이전까지 소련의 대서방 외교 연속성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1979년 6월, 호메이니는 비노그라도프를 불러 직접 경고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에게 가하는 일을 보고 있다. 소련은 이슬람에 적대적이다."
무역 외교에서 출발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중동 외교의 핵심 현장을 두루 거친 외교관이다. 주일 대사와 외무차관을 지낸 뒤, 1970년 이집트 대사로 부임하여 나세르 말기부터 사다트의 서방 전환기까지 카이로에 주재했고, 1973년 10월 전쟁 당시 소련의 대응을 현장에서 조율했다. 1977년 이란 대사로 테헤란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을 목격했으며, 호메이니와의 긴장된 대면을 통해 혁명 정권과 소련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으로 8년간 재임하며 소련 외교의 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했고, 퇴임 후에도 중동 평화정착을 위한 비공식 채널을 이끌었다.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
“1980년대 초 서독은 소련군 철수와 동독의 바르샤바조약 탈퇴만으로 1000억 마르크의 무상 차관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아르히즈에서 140억 마르크를 받아들였다.” — 독일 통일 협상의 대가에 대해
소련 최고의 독일 문제 전문가로, 흐루쇼프와 그로미코의 연설문 작성자로 외교 경력을 시작해 1971–1978년 서독 대사를 지냈다. 1988–1991년 CPSU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서 외무부와 나란히 작동하는 평행 외교 기구를 이끌었고, 1990–1991년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양보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인물로, 1989년 율리 크비친스키와 함께 쇠퇴하는 소련의 군사적 영향력을 에너지 의존으로 대체하려는 팔린-크비친스키 독트린을 정식화했다.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을 사실상 무상으로 허용했다고 비판하며, 모스크바가 최대 1000억 마르크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일방의 우월을 배제하는 평등과 동등한 안보의 원칙 위에서' — 1985년 제네바 군축협상 개시 성명
소련 외무부의 대표적 군축 전문 외교관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SALT-I·SALT-II·INF·START-I에 이르기까지 소련-미국 간 전략무기 협상의 결정적 국면에서 소련 측 실무를 이끌었다. MGIMO 졸업 후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과 외무부 외교정책기획국 고문을 거쳐, 1985년 군축·군비제한문제국장으로서 제네바 협상에서 소련 대표단 단장을 맡았다. INF 전면폐기 조약(1987)과 START-I(1991)의 타결을 실무적으로 관철시켰고, 1990년 외무차관에 올라 소련 붕괴 직전까지 대미 전략무기 관계를 총괄했다.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사임한다. 이것이 나의 항의다”라고 선언하고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58년 콤소몰 대회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난 이후 30년 넘게 그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었다. 1972년 그루지야 당 제1서기가 되어 3만 명을 체포할 정도로 부패와 그림자 경제를 뿌리 뽑으려 했고, 지역 실험장이던 아바샤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1985년 외무장관으로 발탁되어 군축·아프간 철군·독일 통일을 5년 만에 협상해냈고, 1990년 12월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전격 사임했다. 소련 붕괴 후 고향으로 돌아가 내전과 암살 기도 속에서도 10년 넘게 그루지야를 이끌었고, 2003년 장미혁명으로 평화롭게 물러났다.
“2년 반 동안 우리는 입장을 좁혀, 당대 가장 현대적인 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87년 INF 조약에 대해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아래서 외무부 제1차관(1986–1990)을 지내며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소련군 철수 시기인 1988–1989년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겸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군축 수석협상가로서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 도브리닌 아래 워싱턴 대사대리와 인도·프랑스 대사를 거쳐 소련의 마지막 유엔 상임대표와 러시아 초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유엔 사무차장으로서 쿠웨이트 실종자 및 재산 반환을 조정하는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1986년 5월, 유엔 주재 소련 대표에서 워싱턴 대사로 전격 이동한 두비닌은 백악관에 신임장을 제출하며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소련 말기 고르바초프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워싱턴 주재 대사 시절 INF 조약 체결과 몰타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뒷받침했다. 날치크 출신으로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을 졸업하고 유네스코와 주프랑스대사관에서 외교 경력을 쌓은 유럽통이었다. 1986년 봄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를 거쳐 미국 대사로 부임해 냉전 종식을 위한 양국 정상 간 채널이 작동하도록 실무를 조율했다. 1990년 프랑스 대사로 자리를 옮겨 소련 해체까지 파리에 머물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외무차관과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내며 1997년 우크라이나와의 우호협력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1982년 7월 16일, 크비친스키는 제네바 외곽 숲에서 미국 협상가 폴 니츠와 단둘이 거닐며 중거리핵 감축 타협안을 모색했다. 양국 정부가 거부했지만, 이 대화는 리 블레싱의 브로드웨이 연극 『숲속 산책』으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키운 소련의 독일 전문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대서방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1년 제네바 중거리핵전력(INF) 협상 소련 수석대표로서, 1982년 7월 미국 측 폴 니츠와의 비공식 '숲속 산책' 회담은 냉전 군축사의 상징이자 후일 브로드웨이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1986~1990년 주서독 대사로 독일 통일 '2+4 조약' 준비에 참여했고, 1991년 소련 외무부 제1차관으로 유럽 안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 1997년 주노르웨이 대사로 복귀, 2003년부터 사망 시까지 공산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9–1965주동독 소련대사관 통역·무관·3등서기관·2등서기관
1965–1978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 2등서기관·1등서기관·전문고문·부국장
1978–1981주서독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198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제네바 핵군축 협상 소련 대표단 단장
1986–1990주서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CPSU 중앙위원회 위원후보(1986~89)·위원(1989~90)
1991년 8월 21일, 쿠데타 한복판에서 판킨은 체코슬로바키아 TV에 출연했다. 소련 대사 중 유일하게 '야나예프의 치명적 실수'라며 공개 비판하고, 즉각 철회를 촉구한 순간이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신문을 소련 최고의 청년지로 키운 언론인이자, 국가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외교관으로 전환해 8월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공개 비판한 대사였으며,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수립, 미소 군축 협상 개시를 주도했다.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