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91

이념 · 선전

문화, 검열, 선전, 정통 노선을 관리한 당의 이념 장치.

지도부 타임라인

  1. 1917–1929 아나톨리 바실리예비치 루나차르스키 계몽인민위원
  2. 1934–1948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중앙위 서기 · 문화/이념 총괄
  3. 1949–1952 드미트리 트로피모비치 셰필로프 중앙위 선전부장 · 스탈린 말기 이념 장치
  4. 1957 드미트리 트로피모비치 셰필로프 중앙위 서기 · 이념 담당
  5. 1947–1982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 중앙위 서기 · 이념 담당
  6. 1961–1974 표트르 닐로비치 데미체프 중앙위 서기 · 이념/문화 담당
  7. 1955–1986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포노마료프 국제부장 · 국제공산주의 노선 관리
  8. 1985–1990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 정치국 이념 담당 · 글라스노스트

소속 인물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올민스키

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Ольмин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63–1933 ○ 자연사

이스트파르트의 창설자이자 볼셰비키 당사 편찬의 설계자

5학년 때 큰 쉬는 시간, 급우가 교실 문을 닫고 교단에 올라 불법 팸플릿 「죽음에는 죽음으로」를 낭독했다. 메젠초프 헌병사령관 암살에 대한 크랍친스키의 글은 올민스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출발해 1904년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적 문필가다. 차르 감옥에서 5년 가까이 독방 생활을 견뎠고, 신문 《즈베즈다》, 《프라우다》,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의 편집을 맡으며 볼셰비키 저널리즘의 얼굴이 되었다. 1920년 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를 창설해 소비에트 당사 편찬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고, 살티코프-셰드린 연구로 문학비평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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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5나로드나야 볼랴 '청년동맹' 가입, 체포되어 보로네시로 추방
  • 1891–1898'나로드노볼리치 그룹' 공동 창립, 재체포 후 약 5년 독방, 올레크민스크 유형
  • 1904–1905스위스에서 레닌 지도 아래 볼셰비키 합류, 《프페료트》 《프롤레타리》 편집 참여
  • 1905–1916《노바야 지즌》 《볼나》 《즈베즈다》 《프라우다》 《프로스베셰니예》 편집, 바쿠·사라토프에서 활동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 자모스크보레츠키 군사혁명위원, 6차 대회 공동의장, 제헌의회 의원
  • 1918–1920《프라우다》 편집위원, 사회주의 아카데미 교수, 선동열차 강연단 활동
  • 1920–1928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 창설·의장,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창간·편집
  • 1922–1933구볼셰비키협회 회장(회원번호 1번), 살티코프-셰드린 전집 편찬위원장

안나 일리니치나 옐리자로바-울리야노바

Анна Ильинична Елизарова-Ульянова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64–1935 ○ 병사

레닌의 맏누이이자 이스크라 지하유통을 조직한 구볼셰비키 혁명가

1932년 안나는 스탈린에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유대인에 대해 언제나 좋게 말했습니다'라고 쓰며 레닌의 유대인 혈통을 공개해 반유대주의에 맞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거부했다.

레닌의 맏누이이자 1898년 RSDLP에 입당한 구볼셰비키. 동생 알렉산드르의 차르 암살 기도 사건으로 5년 유형을 선고받은 후, 블라디미르의 옥중 연락망과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을 조직했다. 1917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10월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 후 이스트파르트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창립에 참여해 소비에트 역사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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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사건으로 체포, 5년 유형
  • 1898RSDLP 입당, 모스크바 첫 당위원회 활동
  • 1900–1902『이스크라』 유통망 조직 (베를린, 파리, 러시아)
  • 1909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 조직
  • 1913–1917『프라우다』 편집위원, 편집서기
  • 1917RSDLP(b) 중앙위원회국 위원, 10월 혁명 준비
  • 1918–1921인민위생인민위원부 아동보호부장, 교육인민위원부 근무
  • 1920년대–1932이스트파르트·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공동창립,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서기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포크롭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Покров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68–1932 ○ 자연사 (암)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이자 사후 부정된 혁명적 역사가

1920년 12월, 레닌은 포크롭스키에게 『가장 간결한 러시아사』에 대해 "구성과 접근이 독창적이며 굉장한 흥미로 읽힌다"고 썼고, 연표를 보충해 교과서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클류쳅스키의 제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로 전환한 인물로, 러시아사 전체를 계급 분석과 경제 결정론 위에 다시 세웠다. 볼셰비키로서 10월 혁명에 참여했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학문 제도(공산주의 아카데미, 붉은 교수양성원, 이스트파르트, 레닌 연구소, 중앙기록보관소)의 골격을 구축했다. 러시아 전제정을 '모노마흐의 모자를 쓴 상업자본'으로 파악한 그의 테제는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을 규정했으나, 사후 스탈린기에 '포크롭스키 학파'라는 낙인 아래 전면 부정되어 수많은 역사가 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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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1모스크바대학 사학과 졸업, 클류쳅스키·비노그라도프 사사; 대학 잔류하여 교수준비생 지위
  • 1896–1905'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1905년 RSDLP(볼셰비키) 가입, 제네바에서 레닌 첫 대면
  • 1905–1907모스크바 볼셰비키 강연단·신문 ≪보르바≫ 편집; 12월 봉기 참가; RSDLP 제5차 런던대회 대의원·중앙위 후보위원
  • 1908–1917망명: '전진파'·이후 반파벳적 입장; 1차대전 때 국제주의자로 복귀; ≪고대 이후의 러시아사≫ 5권 집필(1910–1913)
  • 1917–1918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7.11–1918.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대표단 위원
  • 1918–1932계몽인민부위원(루나차르스키 대리); 고등교육·과학·기록보관소 개혁 주도; 공산주의 아카데미·적색교수양성원·이스트파르트·레닌연구소·중앙기록보관소장
  • 1920–1923≪가장 간결한 러시아사≫ 출간 —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의 표준 교재
  • 1929–1932소비에트 아카데미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회원 선출(1929); 중앙통제위원회 상임위원(1930–1932); 암으로 사망

판텔레이몬 니콜라예비치 레페신스키

Пантелеймон Николаевич Лепешин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벨라루스 1868–1944 ○ 자연사

당 역사 기록화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이스트파르트의 공동 창립자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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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 1925–1927소련 MOPR(국제혁명투사원조회) 중앙위원회 의장
  • 1927–1930, 1935–1936국립역사박물관 관장, 이후 혁명박물관 관장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

Надежд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Крупская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69–1939 ○ 복막염

남편의 그림자 속에서 소비에트 학교와 도서관을 만든 여성

그녀의 방은 언제나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촛불에 암호 편지를 쬐어 읽고, 수백 명 지하 요원의 가명과 주소를 머릿속에 보관한 여성. —트로츠키, 『나의 삶』

레닌의 아내이자 가장 오랜 동지였지만,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었다. 하급 귀족 출신으로 마르크스주의 서클에서 활동하다 1898년 슈셴스코예에서 레닌과 결혼했고, 「이스크라」지 서기로서 수백 명의 비밀 통신망을 운영하며 당의 신경계가 되었다. 혁명 후 소비에트 교육의 총설계자로서 리크베스 문맹 퇴치, 통합노동학교, 공공도서관망을 구축했으며, 교육을 인민의 자기 해방으로 보는 관점을 견지했다. 1925년 신반대파에 가담했다 철회했고, 아동문학에 대한 교조적 접근은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70세 생일 이튿날 복막염으로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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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오볼렌스카야 여성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 1889–1890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수학, 마르크스주의 서클 가입
  • 1891–1896페테르부르크 넵스카야 자스타바 성인 야간학교 교사, 노동자 선전 활동
  • 1898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 RSDLP 입당
  • 1901–1905뮌헨·런던 망명, 「이스크라」지 서기
  • 1905–1907러시아로 귀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 1911롱쥬모 당학교 교사, 여성지 「라보트니차」 창간 참여
  • 1917–192010월 혁명 참여, 콤소몰·피오네르 조직 설계, 글라브폴리트프로스베트 의장
  • 1924–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25년 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 지지 후 철회
  • 1927–1939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29–1939RSFSR 계몽인민부위원, 소비에트 교육·도서관·검열 정책 주도
  • 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
  • 1937소비에트 최고회의 제1기 대의원,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

이반 이바노비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Скворц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70–1928 ○ 장티푸스

『자본』을 러시아어로 옮기고 최초의 재무인민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지식인

「수동적으로 굶주리고 말없이 죽어가는 농촌 — 아니다, 이것은 사회 발전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가 아니다」 — 1919년 회고록에서 1891–1892년 기근이 자신의 세대에 끼친 영향을 회고하며

1898년 입당한 초기 볼셰비키. 마르크스 『자본』의 러시아어 번역을 주도했으며, 레닌이 최고의 번역으로 꼽은 판본을 남겼다. 1917년 10월 소비에트 정부의 초대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즈베스티야』와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레닌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철학 논쟁에서 '기계론자' 진영을 이끌었고, 야로슬랍스키와 함께 전투적 무신론 운동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25년부터 사망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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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차르 암살 준비 혐의로 체포, 툴라 유배 중 사회민주주의자로 전향
  • 1901모스크바 사회민주당 위원회 조직 시도 중 체포, 시베리아 아친스크 유배
  • 1907–1909보그다노프·바자로프와 함께 마르크스 『자본』 러시아어 번역 출간
  • 1917.10RSFSR 초대 재무인민위원 임명 (취임하지 않음);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20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
  • 1925–1928『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이후 『프라우다』 부편집장 겸 레닌 연구소 소장
  • 1926–1928『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철학 논쟁에서 기계론자 진영 지도

아나톨리 바실리예비치 루나차르스키

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Луначар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75–1933 ○ 자연사

혁명 뒤 문화와 교육을 맡은 계몽인민위원

1917년 11월 15일, 계몽인민위원 취임 8일 만에 루나차르스키는 모스크바 크렘린 포격으로 성 바실리 대성당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사임을 선언했다. "이 공포를 멈출 힘이 없다. 이 미칠 듯 무거운 생각 아래서 일할 수 없다." 이틀 뒤 사임을 철회하고 12년간 문화혁명을 이끌었다.

10월 혁명 뒤 12년간 초대 계몽인민위원으로서 문맹 퇴치·학교 재편·박물관 국유화를 총괄하며 소비에트 문화정책의 틀을 세웠다. 말레비치와 마야콥스키 같은 전위예술가들을 지원하면서도 차르 시대 미술관 컬렉션을 한 점도 팔지 않겠다고 공언한 복합적 인물이었다. 초기에는 '신건설(보고스트로이첼스트보)'을 주창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집단적 종교 감수성으로 재해석했고, 레닌과 철학적·정치적 결별을 겪었다. 극작가·비평가로도 왕성했고, 1929년 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뒤 학술원 회원과 외교관으로 일하다 스페인 대사 임명 직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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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1904마르크스주의 서클과 망명 활동, 문예비평가로 성장
  • 1905–1914볼셰비키·전진파(Vpered) 논쟁, 혁명문화와 예술정책 구상
  • 1908–1911전2권 《종교와 사회주의》 출간
  • 1914–171차대전 반대 국제주의 입장, 망명 중 반전 활동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볼셰비키·멘셰비키 통합파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1929계몽인민위원, 학교·박물관·극장·출판 행정 총괄
  • 1918–1921전위예술 후원과 문화유산 보존 사이에서 초기 소비에트 문화정책 조정
  • 1923인물평 모음 《혁명적 실루엣》 출간
  • 1929–1933외교·학술 직책으로 이동, 스페인 대사 임명 직후 사망

마리야 일리니치나 울리야노바

Мария Ильинична Ульянова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78–1937 ○ 뇌동맥경화

레닌의 막내동생이자, 연필로 혁명을 편집한 언론 조직가

1917년 봄, 페트로그라드의 『프라우다』 편집실 — 마리야 울리야노바가 원고 더미 앞에 앉아 연필을 쥐고 있었다. 혁명의 신문을 편집하는 유일한 울리야노프 집안 사람이었다.

레닌의 막내 여동생. 1898년 RSDLP 입당 후 여섯 차례 체포·유형을 겪으며 활동했다. 1917~1929년 『프라우다』 편집위원 겸 책임서기로 랍코르·셀코르 운동을 조직, 소비에트 언론의 초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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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심비르스크 여성 김나지움 졸업
  • 1896–1898모스크바 2년제 과정 수료, 가정교사 자격 취득
  • 1898RSDLP 입당, 노동자 서클 선전·연락 활동
  • 1899–1900체포, 니즈니노브고로드 유형
  • 1900–1903「이스크라」 대리인, 당 중앙위 서기국 근무
  • 1901체포, 타간카 감옥 7개월 독방 후 사마라 유형
  • 1904체포 후 보석, 스위스 망명
  • 1905–1907페테르부르크 바실레오스트롭스키 구당위 서기
  • 1908–1909파리 소르본에서 불어 교사 자격 취득
  • 1912체포, 볼로그다 유형
  • 1915간호 과정 수료, 서부전선 의료·영양 부대 복무
  • 1917.3RSDLP(b) 중앙위원회 국에 보선, 6차 대회 대의원
  • 1917–1929『프라우다』 편집위원 겸 책임서기, 랍코르·셀코르 운동 조직
  • 1925–1934중앙통제위원회(CCC) 위원
  • 1932–1934중앙통제위원회 상임간부회 위원
  • 1935–1937소비에트 통제위원회 위원,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33레닌 훈장 수훈

아브람 모이세예비치 데보린

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Деборин
이념 · 선전 소련 리투아니아 1881–1963 ○ 자연사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창설자,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정되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미코얀에게 답하며 (1956년 면담, 네크리치 회고록)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았다.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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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 1921–1926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1),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
  • 1926–1931『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주필, 공산아카데미 철학부장,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1929),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29)
  •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복귀, 사회과학부·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37~1941), 1956년 미코얀 면담 후 저작 복간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그레코프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Грек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82–1953 ○ 자연사

키예프 루스 봉건제론을 정립한 소비에트 중세사의 창시자

1939년, 그레코프는 키예프 루스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민족의 공동 요람"으로 규정하며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근간을 세웠다.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창시자. ≪키예프 루스≫(1939)에서 키예프 루스를 봉건 국가로 규정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공동 요람으로 정립했다. 1936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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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바르샤바대학에서 페트루셰프스키 사사 후 모스크바대학으로 편입, 류뱝스키 지도 아래 졸업
  • 1910–1916페테르부르크 김나지움 교사, 셰레메테프 가문 도서관장; 플라토노프 지도로 석사논문 방어(1914) 후 페트로그라드대학 사강사
  • 1916–1921페름대학 러시아사 강좌 개설 및 초대 주임(1916–1918); 내전기 타브리다대학 교수 겸 타브리다 학술기록위원회 부위원장
  • 1930'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약 한 달 구금 후 톰신스키의 신원보증으로 석방
  • 1934–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4), 정회원(1935); ≪키예프 루스≫(1939) 출간 — 봉건제론 정립
  • 1936–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소장; 역사·철학부 아카데미 서기(1946–1953) 겸임
  • 1943–1952스탈린상 3회(1943, 1948, 1952), 레닌훈장 2회(1944, 1952); 물질문화사연구소장(1943–1947)·슬라브학연구소장(1947–1951) 겸임
  • 1947–1953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1947–1950) 및 소련 최고소비에트(1950–1953) 대의원; 1953년 9월 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안드레이 세르게예비치 부브노프

Андрей Сергеевич Бубн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84–1938 ✕ 처형

10월혁명 정치국원에서 문맹퇴치를 이끈 계몽인민위원으로

1917년 10월 16일, 부브노프는 무장봉기를 지휘할 5인 당중심에 선출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 야전참모장으로서 그의 임무는 페트로그라드의 우편·전신 체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10월혁명을 지도한 1917년 정치국원이자,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1924–1929), 러시아공화국 계몽인민위원(1929–1937)을 지냈다. 붉은 군대에 정치교육 체계를 세웠고,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의무적 초등교육 도입과 대규모 성인 문맹퇴치(리크베즈)를 추진해 소비에트 교육의 제도적 토대를 완성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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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519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총파업 조직
  • 1906–1913스톡홀름 당대회 대표, 《프라우다》 편집위원
  • 1914–1916사마라·볼가 하류 지역 혁명운동 지도, 투루한스크 유배
  • 1917정치국원, 군사혁명당중심 위원,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야전참모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22–1924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4–1929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편집장
  • 1925중앙위원회 서기
  • 1929–1937러시아공화국 계몽인민위원 — 의무초등교육·문맹퇴치·아동문학 출판사 설립

볼로디미르 페트로비치 자톤스키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Затон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우크라이나 1888–1938 ✕ 처형 · 복권 1956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건설자이자 학자정치인, 교육·당·통제를 관통한 혁명 관료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개표위원장으로서 스탈린 반대표가 대량 나왔음을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 훗날 아들에게 "그것이 내 사형선고였다"고 말했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의 창립 세대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결성을 주도하고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었고 소련 수립 조약에 서명했다. 교육인민위원으로 두 차례(1922~1924, 1933~1938) 재임했으며, 1933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후퇴를 집행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이자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학술 기반을 구축했고, 중앙위원회 서기와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영화관에서 체포되어 20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당했으며,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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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키이우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후 키이우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
  • 1917.3–1917.11볼셰비키로 전향, 키이우 당위원회 위원장,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
  • 1917.12–1918.3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비서국 교육담당 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우크라이나 대표단장
  • 1918.3–1918.4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국가원수)
  • 1918.7–1920좌파에스에르 반란 진압 공산대대 정치위원, 붉은군대 제12·13·14군 및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7–1920.9갈리치아 혁명위원회 의장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적기훈장 수훈
  • 1921–1922전우크라이나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 의장
  • 1922–1924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차), 소련 수립 조약 서명
  • 1924–1925우크라이나·크림 군관구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정위원
  • 1927–1932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3–193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2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V. 볼로다르스키 (모이세이 마르코비치 골드시테인)

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이념 · 선전 러시아 러시아 1891–1918 ✕ 암살

10월 혁명기 페트로그라드의 선전 인민위원, 암살로 붉은 테러의 불씨가 되다

「동지들이여, 내가 시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 나는 인류의 시계, 세계 혁명의 시계를 보고 있다」

페트로그라드의 출판·선전 인민위원이자 탁월한 군중 연설가. 볼셰비키 검열 체계를 구축하고 『크라스나야 가제타』를 창간했다. 1918년 6월 SR 전투원의 총에 암살되어 우리츠키 피살·레닌 피격과 함께 붉은 테러 전면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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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4세에 분트 가입, 불온 혐의로 김나지움 퇴학
  • 1908–11볼린·포돌리아에서 사민주의 선동원 활동
  • 1911–13피네가 유형,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석방
  • 1913–17미국 망명: 필라델피아 재단사, 『노비 미르』 공동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6–8볼셰비키 합류, 수석 선동원, 제6차 당대회 대의원
  • 1917.9–10페트로그라드 평의회 간부회, 10월 봉기
  • 1917.11–1918.6VTsIK 간부회, 출판·선전·선동 인민위원, 『크라스나야 가제타』 창간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스테츠키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Стец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96–1938 ✕ 처형

부하린파 '적색 교수'에서 스탈린 문화정책의 집행자로 전향한 선전 책임자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1934년 8월 30일)에서 한 연설: "우리에게는 문학의 노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입니다. 그리고 그 외 모든 것에서는 자유로운 창조적 경쟁입니다."

1915년 입당한 볼셰비키 선전가. 초기 부하린파에서 스탈린 편으로 전향해 1930-1935년 중앙위 문화선전부장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제도화를 주도했다. 1938년 처형·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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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 1917당 선동원, 10월 봉기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란 진압 참가
  • 1918–1920적군에서 군사정치 및 참모 업무
  • 1921–1923적색교수양성소 수학, 부하린파 '적색 교수' 그룹
  • 1925『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초대 주필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작가동맹 조직위 실질적 운영
  • 1934–1938중앙위 조직국 위원, 잡지 『볼셰비키』 주필
  • 1935–1938중앙위 당 선전선동부장, 대숙청기 선전 캠페인 조직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дан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96–1948 ○ 자연사

스탈린주의 문화정책에 이름을 남긴 이념 관리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이라는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중앙위 서기 겸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오른 뒤,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사형 집행 명단에 서명했으며 1941-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도시 방어를 진두지휘했다. 전후 당내 실질적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이념 캠페인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하며 소비에트 문화사를 규정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과 함께 세계를 '두 진영'으로 나누는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키로프와 역사 교과서 지침을 공동 집필한 당의 수석 이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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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 1934–1944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 도시 방어와 정치동원 책임자
  • 1946–1948중앙위 서기, 문학·음악·철학 캠페인을 주도
  • 1947코민포름 창설과 두 진영 노선 제시
  • 1948사망 뒤에도 「즈다노프주의」가 전후 문화통제의 이름으로 남음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펠로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пел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98–1979 ○ 자연사

스탈린의 전기를 쓰고, 그 신화를 해체한 역사가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포스펠로프는 주체할 수 없이 흐느꼈다. 베리야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무슨 일이야? 그만해!"라고 외쳤다. 불과 3년 뒤, 바로 그가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된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를 작성했다.

스탈린 공식 전기를 집필하고 『프라우다』를 9년간 이끈 당 역사가. 흐루쇼프 시기에는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로 스탈린 신화 해체의 기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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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볼셰비키 입당, 트베리에서 노동조합·당 활동, 첼랴빈스크에서 백군 점령 하 지하운동, '죽음의 열차'로 알렉산드롭스크 중앙형무소 수감 후 탈출, 시베리아 파르티잔 활동
  • 1924–1930중앙위 선전선동부 교관, 붉은 교수양성소 경제학부 졸업
  • 1931–1939잡지 『볼셰비키』 및 『프라우다』 편집, 당통제위원회 출판 담당, 「볼셰비키 전연방공산당사 단기강좌」 집필 참여, 아지트프로프 부책임자 (1937–1939), 제1부책임자 (1939–1940)
  • 1940–1949『프라우다』 주필, 전시 스탈린상 수상금을 국방기금에 기부, 증보판 「이오시프 스탈린 약전」 편찬 참여
  • 1949–1952, 1961–1967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 (두 차례), 다권본 「소비에트 연방 대조국전쟁사」·「레닌 전기」 편집 주도
  • 1953–1960중앙위 서기, '포스펠로프 위원회' 위원장으로 스탈린 시대 대량 탄압 조사 — 보고서는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됨
  • 1957–1961중앙위 간부위원회 후보위원, 1959년 제21차 당 대회에서 말렌코프 반당 그룹 비판 연설
  • 1972–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부 아카데미크 서기 대행, 1973년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말년에 『볼셰비키』 지를 통해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스탈린의 역할을 옹호하는 복합적 입장 견지

파벨 표도로비치 유딘

Павел Фёдорович Юдин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99–1968 ○ 자연사

스탈린주의 철학 정통을 세우고 말년에 소련 문화사의 토대를 잉태한 철학자 외교관

「유딘과 미틴은 하늘의 별을 딸 재목은 아니지만, 기술적으로는 일을 잘 안다」 — 스탈린, 두 철학자를 평가하며

1930년 '3인의 편지'로 데보린 학파를 숙청한 철학자.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하고 주중 대사로 중소 분열을 목격했다. 말년에 비정통파 문화사학자들을 보호해 소련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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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니제고로드 현 아프락시노 촌락 빈농 가정 출생, 1912년 니즈니노브고로드로 이주하여 선반공 견습
  • 1918–1921붉은 군대 지원 입대, 콜차크군과 교전. RKP(b) 입당(1918.10), 정치지도원에서 제57소총사단 연대 정치위원까지 승진
  • 1921–1931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1924), 니제고로드 현당 선전선동부장·현신문 『즈베즈다』 편집국장(1924~1927),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1931)
  • 1930–1932미틴·랄체비치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새로운 과제에 대하여」(『프라우다』 1930.6.7) 발표 — '3인의 편지'로 데보린 학파 숙청 개시
  • 1932–1938적색교수양성소 소장, 『문학비평가』 주필(1933~1937),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차 대회 조직위 책임서기, 아기트프롭 부장(1934~1937)
  • 1937–1947국립출판사연합(OGIZ) 소장, 1937년 「왜 RAPP를 해체해야 했는가」로 키르숀·아베르바흐 공격 — 키르숀은 이후 체포·처형됨
  • 1939–1944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통신회원(1939), 『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1등급(1943), 모스크바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임(1943~1948)
  • 1950–1951스탈린의 개인적 지시로 베이징 파견 — 마오쩌둥 『선집』 러시아어판 편집, 중국 각지에서 정치·이론 강연. 마오와 철학·정치 대화
  • 1952–1959CPSU 중앙위원(1952~1961), 당중앙 간부회의 후보위원(1952.10~1953.3). 주중 소련 대사(1953.12~1959.10) —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노선에 비협조, 중소 분열 초기 목격 후 소환
  • 1960–1968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인류와 문화' 4권 기획 참여. '세계 문화사' 프로젝트 지도 — 아베린체프·구레비치·카주단 등 비정통파 학자 기용, 사후 소련 문화사 연구의 토대를 남김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 알릴루예바

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1–1932 ✕ 권총 자살

레닌 비서실에서 일하고 스탈린과 결혼한, 자신의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던 볼셰비키 여성

1932년 11월 8일 밤 보로실로프의 만찬에서, 스탈린이 그녀에게 오렌지 껍질을 던지며 '이봐!'라고 부르자 알릴루예바는 '나는 당신의 "이봐"가 아니에요!'라고 응수하고 자리를 떠났다.

올드 볼셰비키 가문의 막내딸로, 1917년 7월 봉기 당시 아버지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는 자택에 레닌을 은닉했고, 대부는 아벨 예누키제였다. 1918년 당 입당 후 레닌 비서실과 선동선전부에서 일했고, 1929년 산업아카데미에 입학해 합성섬유 공학을 공부하며 니키타 흐루쇼프의 당 셀 동료가 되었다. 스탈린과의 결혼은 그녀를 크렘린 중심에 두었으나, 독립적 정치 주체로 서려는 열망과 아내 역할 사이의 긴장 속에서 1932년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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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8–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비서
  • 1919–1921V.I. 레닌 비서실 근무 (리디야 포티예바 지휘 하)
  • 1921당 숙청으로 제명, 레닌의 개입으로 후보당원 복권 (1924년 정식 복권)
  • 1924–1929선동선전부 국제농업연구소 보좌관
  • 1929–1932모스크바 산업아카데미 섬유학부 학생 (합성섬유 전공), 니키타 흐루쇼프와 동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셰르바코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Щербак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1–1945 ○ 심장마비

스탈린의 전시 선전 책임자이자 모스크바 당 보스, 죽음은 「의사들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41년 10월 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20km 앞까지 진격해 시민들이 공황에 빠지자, 셰르바코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모스크바를 위해 끈질기게, 치열하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호소하며 도시의 질서를 되살렸다.

스탈린의 전시 최측근으로, 1938년부터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부터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으로서 대외선전과 국내 언론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을 겸해 군 정치교육과 사기 진작을 책임졌다.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을 당의 문학 정책 도구로 정비했다. 모스크바 당 책임자로서 전시 방공·피난·군수 생산을 조직했고, 1945년 승리 직후 43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탈린 말년 「의사들 음모」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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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 입대, 1918년 볼셰비키당 가입, 리빈스크에서 청년 조직 활동
  •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
  • 1930–1932적색교수양성소 역사-당 과정 수료, 이후 중앙위 조직지도부 및 문화선전부 근무
  • 1934–1936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 참여, 고리키 아래 조직서기로서 문학 행정 장악
  • 1936–1938레닌그라드 제2서기 → 동시베리아·이르쿠츠크 제1서기 → 스탈리노(도네츠크) 제1서기로 연쇄 이동
  • 1938–1945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 1942년 총정치국장 겸 국방부인민위원
  • 1941–1945정치국 후보위원(1941), 중앙위 서기(1941), 대장군 계급(1943), 전시 선전 및 군 정치사업 총괄
  • 19455월 10일 43세로 심장마비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

마르크 보리소비치 미틴

Марк Борисович Митин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1–1987 ○ 자연사

스탈린 시기 변증법적 유물론을 국가 교리로 제도화한 철학 총책

「철학 전선의 절대다수가 적, 배신자로 밝혀져 NKVD에 체포되었다」 — 1937년 5월 철학연구소 총회에서 동료 철학자들의 대숙청을 정당화하며

데보린 학파를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몰아내고 스탈린주의 철학을 제도화한 소련 철학계의 최고 책임자. 30년간 당적 통제를 상징했으나, 말년에 표절 파문으로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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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지토미르 유대인 가정 출생, 본명 모르드코 게르셰비치 게르시코비치
  • 1919–1921RKP(b) 입당(1919), 지토미르 시·볼린 현 콤소몰 제1서기, 특수임무부대(CHON) 복무
  • 1921–192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수료,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공산주의교육아카데미 부총장
  • 1931–1933데보린 학파에 대한 철학 논쟁 주도 —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유딘과 함께 스탈린주의 철학 노선 확립
  • 1931–1944『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주필, 공산아카데미·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활동,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9–1944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IMEL) 소장, 중앙위원(1939~1961), 『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1등급(1943)
  • 1944–1950스탈린상 철회 후 주필·소장직 해임, 『볼셰비키』 편집국 책임비서, 고급당학교 변증법적유물론 주임
  • 1950–1968부쿠레슈티 코민포름 기관지 주필(1950~1956), 즈나니예 협회장(1956~1960), 『철학의 제문제』 주필(1960~1968), 표절 파문으로 퇴진
  • 1970–1987국가와법 연구소 분과장(1970~1985), 플레하노프상 수상(1982), 노환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콘스탄티노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Константин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1–1991 ○ 자연사

『철학 백과사전』 주필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 교과서의 설계자

「이건 그들에 대해 쓴 겁니까, 아니면 우리에 대해 쓴 겁니까?!」 — 레바다의 『철학 백과사전』 '파시즘' 표제어 원고에 친필로 남긴 결재 의견

해빙기 소련 철학의 공식 교리를 수호한 이념 관료. 5권 『철학 백과사전』 주필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설정했고, 동료들 사이에선 흔들림 없는 '스탈린주의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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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니제고로드 현 노보숄키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출생
  • 1917–192010월혁명·시베리아 내전 참전, 1918년 RKP(b) 입당
  • 1932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IMEL 선임연구원(1932~1933)
  • 1933–1941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학술비서(1933~1935), 『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주필 겸 『프라우다』 부장(1935~1941), 1935년 교수·철학박사
  • 1941–1945중앙위 선전선동국 강사(1941~1942), 자원입대해 제84소총군단 전리품 부서장, 중령, 적성훈장 2회
  • 1945–1954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부소장·당위 비서(1945~1951), 『철학의 제문제』 주필(1952~1954), 모스크바대학 철학부 주임(1953~1954),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1954~1955)
  • 1955–1958중앙위 선전선동부장(1956년부터 연방공화국 담당), 중앙위원 후보(1956~1961)
  • 1958–1967『콤무니스트』 주필(1958~1962), 철학연구소장(1962~1967),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4)
  • 1960–19705권짜리 『철학 백과사전』 주필 — 소련 철학의 공식 지식 총서 총괄
  • 1967–1991과학아카데미 철학·법학부 학술비서(1967~1975), 소련철학회 창립 회장(1971~1987), 『지식』협회 부회장(1968~1987), 노환으로 사망, 트로예쿠로보 묘지 안장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

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Сусл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2–1982 ○ 자연사

크렘린의 회색 추기경

수슬로프가 출장을 가면 키릴렌코가 서기국을 대신 주재했다. 돌아오자마자 수슬로프는 자신의 부재 중 내려진 결정을 모조리 뒤집었다. —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스탈린 시대에 부상해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를 거치는 동안에도 좀처럼 권력의 전면에 나서지 않아, 경력의 여러 대목과 실제 영향력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사생활에서는 금욕적이었고, 당의 교리와 문화적 허용 범위를 엄격히 지킨 보수적 이데올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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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당 학교와 경제 행정에서 성장, 북캅카스·스타브로폴 당직 수행
  • 1944–1946리투아니아 당국에서 전후 소비에트화와 반민족주의 통제에 관여
  • 1947–1982중앙위 서기, 이념·선전·정통 노선의 장기 관리자
  • 1956스탈린 비판 이후에도 당 정통성과 통제 언어를 재정리
  • 1964–1982브레즈네프 체제의 보수적 이념 심판관

보니파티 미하일로비치 케드로프

Бонифатий Михайлович Кедр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3–1985 ○ 자연사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화하고 '케드로프 삼각형'을 정립한 과학철학자

「이게 무슨 개인의 비극이란 말인가?! 당과 인민의 비극 — 그게 진짜 비극이다!」 —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 『로지나』 1995년 제8호

야로슬라블 출생, 15세 볼셰비키. 모스크바대학 화학과·적색교수양성원 철학과 졸업. 1947년 『철학의 제문제』 창간 편집장. 돌턴·멘델레예프·과학 분류론 중심 1000여 편 저술, '케드로프 삼각형' 제시. 1940년대 말 반공명이론 캠페인 주도. 이후 과학사연구소 소장(1962–1972)·철학연구소 소장(1973–1974) 역임하며 과학사·방법론 제도화.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으로 진급 지연,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1966년 아카데미크, 198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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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셰비키 입당; 『프라우다』 책임비서 M.I. 울리야노바 보좌, 체카 근무
  • 1930–1935모스크바대학 화학과 졸업; 화학 준박사 (깁스 역설)
  • 1935–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과학부 지도원
  • 1939–194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1946년 철학 박사; 1941–1945년 붉은군대
  • 1947–1949『철학의 제문제』(Вопросы философии) 창간 편집장
  • 1955–1972과학사연구소(IIET) 선임연구원 → 소장(1962–1972)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7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크루슈코프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Кружк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스탈린 전기를 공동 집필하고 즈다노프 노선을 집행한 후 성 스캔들로 몰락한 이념 관료

흐루쇼프가 '검투사 사건'에서 외친 말: "알렉산드로프는 젊으니 이해하겠다. 그런데 너는 그 나이에 거길 왜 갔느냐?" — 크루슈코프와 이념 관료들은 이 한 방에 모조리 직위에서 사라졌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념 관료. 러시아 고전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1944~1949)으로서 스탈린의 공식 단평전(1947)을 공동 집필하고 마르크스주의 정전 편찬을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장(1950~1953)과 선전선동부장(1953~1955)을 역임하며 후기 스탈린 시기 문화 통제와 즈다노프슈치나 노선의 집행자로 활동했다. 1955년 이른바 '검투사 사건'으로 불리는 성 스캔들에 연루되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었고, 우랄 지방으로 좌천된 후 학계로 복귀하여 소련 예술사연구소장(1961~1973)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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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크룹스카야 공산주의 교육 아카데미 졸업
  • 1933공산주의 사회과학 교원대학 철학부 대학원 수료
  • 1940교수 학위 취득
  • 1941–1942대외정책선전국 위원
  • 1942–1943소비에트 정보국 위원
  • 1943–1944잡지 『전쟁과 노동계급』 부편집장
  • 1944–1949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
  • 1947스탈린 공식 단평전 공동 집필
  • 1949–1950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제1부부장
  • 1950–1953중앙위 문학예술부장
  • 1950철학 박사학위 논문 방어
  • 1952–1956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53–1955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55–1961우랄 국립대 교수·『우랄 노동자』 편집장
  • 1961–1973소련 문화부 예술사연구소장

드미트리 트로피모비치 셰필로프

Дмитрий Трофимович Шепилов
이념 · 선전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05–1995 ↓ 실각 1957

흐루쇼프의 이론가에서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가 된 사람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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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모스크바대 법학부 졸업, 야쿠츠크 검찰 업무
  • 1931–1933적색교수학원, 농업경제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
  • 1937–1941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학술서기, 경제학 교육·연구
  • 1941–1946전쟁기 정치장교, 소장 계급으로 종전
  • 1946–1949군 선전부와 당 선전선동부 실무
  • 1949–1952중앙위 선전부장, 스탈린 말기 이념 장치 운영
  • 1952–1956『프라우다』 주필,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기의 이론가
  • 1955–1956중앙위 서기, 흐루쇼프 노선의 이론적 지원
  • 1956–1957외무장관, 수에즈 위기와 제3세계 외교
  • 1957반당그룹 가담으로 실각
  • 1957–1960키르기스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로 좌천
  • 1960–1982모스크바 국가문서보관소 하급직, 정치적 주변화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포노마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ономарё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5–1995 ○ 자연사

국제공산주의 노선을 관리한 당 국제부장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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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1943코민테른 기관에서 활동, 국제공산주의 네트워크 실무를 익힘
  • 1943–1955코민테른 해산 뒤 중앙위 국제 라인에서 각국 공산당 관계 관리
  • 1955–1986중앙위 국제부장, 세계 공산당과 민족해방운동 지원 노선 관리
  • 1960s–1970s중소분쟁과 유로코뮤니즘 속에서 모스크바의 정통 노선을 방어
  • 1986 이후고르바초프의 외교·당 개혁 속에서 퇴장

레오니트 표도로비치 일리초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Ильичё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6–199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를 모두 편집하고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한 철학자

1952년, 스탈린은 정치국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라우다 편집장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 더 강한 사람을 임명하고, 이 사람은 좀 더 배우게 하라."

흐루쇼프 시대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을 지내며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하고 라디오 마야크를 창설했다. 이후 24년간 외무차관으로 중국과의 국경협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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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북캅카스 공산대학 졸업
  • 1937적색교수양성소 졸업 (철학)
  • 1938–1944잡지 《볼셰비크》 책임비서
  • 1944–1948《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51–1952《프라우다》 편집장
  • 1953–1958소련 외무부 출판국장, 《메주두나로드나야 지즌》 편집장 겸임
  • 1958–1961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연방공화국 담당)
  • 1961–1965CPSU 중앙위원회 서기, 이념위원회 의장, 이념부장
  • 1965–1989소련 외무차관
  • 1962소련 과학원 학술원 회원 (철학)

게오르기 표도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Георгий Фёдо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08–1961 ↓ 좌천 1955

스탈린의 수석 이념 감독관, 철학 논쟁에 무너지다

1947년 6월 철학 논쟁장. 즈다노프가 500명 앞에서 묻는다: "이 책에서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서로를 깨물어먹는 장면은 묘사했으면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어떻게 그 모두를 쓸어버렸는지는 어디 있습니까?" 알렉산드로프는 침묵한다.

스탈린 시대 수석 철학 관료. 고아에서 선전선동국장까지 올라 『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을 받았으나, 1947년 철학 논쟁으로 실각했다. 문화장관도 성추문으로 1년 만에 민스크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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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20s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전기기사 아들. 내전기 고아가 되어 보리소글렙스크 고아원에서 성장
  • 1930–1935모스크바 철학문학사연구소(МИФЛИ) 졸업 및 아스피란투라 수료
  • 1935–1939МИФЛИ 교수, 철학사 전공.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박사학위
  • 1939중앙위 선전선동국 부국장 겸 고등당학교(ВПШ) 교장
  • 1940–1947중앙위 선전선동국장: 전쟁기 선전·대외이념공세·전후 문화통제 주도
  • 1943, 1946『철학사』3권과 『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 2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스탈린 전기(2판) 공동 집필
  • 19476월 철학 논쟁: 스탈린·즈다노프의 비판. 9월 선전선동국장 해임, 철학연구소장으로 전출
  • 1954–1955소련 문화장관 임명. 1년 만에 「검투사 사건」 성추문으로 파면
  • 1955–1961민스크의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철학법률연구소 분과장으로 좌천, 말년을 보냄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페도세예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Федосее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인 1908–1990 ○ 자연사

소련 이념 장치의 철학 행정가

1973년 사하로프 규탄 공개서한에서, 페도세예프를 비롯한 소련 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은 사하로프가 '소련의 국가 체제와 대내외 정책을 비방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고 규정하며 그의 활동을 '소비에트 과학자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소련의 철학 행정가로, 농민 출신에서 과학아카데미 부총재까지 올라 30년 가까이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관리한 당 이념의 수호자였다. 철학연구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중앙위원(1961~1989)을 지내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감시했고, 1973년 사하로프를 공개 규탄한 과학아카데미 서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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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고리키 사범대학 졸업, 동 대학 철학 강사
  • 1936모스크바 역사철학연구소 대학원 수료, 철학 후보박사
  • 1936–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41–194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국 제1부국장
  • 1945–1949당 중앙 기관지 『볼셰비키』 주필 (1949년 7월 중앙위 결정으로 해임)
  • 1950–1954중앙위원회 감사관 · 고등당학교 변증법적 유물론 주임
  • 1954–1955『파르티나야 지즌』(당 생활) 주필
  • 1955–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장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2–1967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인문사회과학 담당)
  • 1967–1973중앙위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 1971–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재임)
  • 1961–1989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28년간)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트라페즈니코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Трапезник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12–198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학문 정통성의 문지기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역사학부는 그를 통과시켰지만, 총회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이 반대 연설을 하자 표결은 부결되었다. 10년 뒤 통신회원 선출은 '절대 정회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가능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을 지내며 소련 학계의 인사·교과과정·출판을 통제한 브레즈네프 시대 이념 관료였다. 박사 학위 논문과 주요 저작들은 집단화의 공식 역사서술을 형성했고, 1960년대 중반 스탈린 복권 캠페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모스크바 고등당학교 부학장과 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을 거쳐 브레즈네프의 개인 비서관을 지냈으며, 그 인연으로 과학·교육 부문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의 반대로 낙선할 정도로 불신을 샀으나, 10년 후 통신회원으로 선출되며 학계 내 입지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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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4중부볼가 지방 콤소몰 활동, 1931년 당 입당
  • 1935–1944펜자주 당 간부, 세르돕스크 지역위 제1서기, 펜자주당 농업부장
  • 1948–1956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 겸 『몰도바 공산주의자』 편집장
  • 1956–1960중앙위 서기 L.I. 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0–1965중앙위 고등당학교 연구부학장
  • 1965–1983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학계 인사·교육과정·출판의 최종 심판관

블라디미르 일리치 스테파코프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Степак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12–1987 ○ 자연사

레닌 테제 오류로 축출된 브레즈네프기 아지트프롭 수장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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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3모스크바주 MGB 부국장
  • 1957–1961모스크바 시당 선전선동부장 → 제2서기
  • 1964–1965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65–1970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브레즈네프기 일상 이념 장치 총괄
  • 1967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 1971–1978주유고슬라비아 소련 대사

세르게이 미트로파노비치 코발료프

Сергей Митрофанович Ковалёв
이념 · 선전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3–1990 ○ 사망

프라우다 지면에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정식화한 소련 이념가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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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8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
  • 1948–1951전연방공산당 쿠르스크주위원회 서기
  • 1951–1956국영정치출판사(고스폴리티즈다트) 사장
  • 1960–1965『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편집자
  • 1965–1971『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
  • 1971–1980『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
  • 1980–1990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지먀닌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Зимянин
이념 · 선전 소련 벨라루스 1914–1995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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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

표트르 닐로비치 데미체프

Пётр Нилович Демиче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17–2010 ○ 자연사

문화정책을 관리한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61년 10월, 모스크바 시당 국 회의에서 데미체프는 단호히 말했다. '스탈린의 시신을 마우솔레움에 두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며칠 뒤 10월 31일 밤, 시신은 비밀리에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묻혔다.

흐루쇼프의 보좌관에서 출발해 24년간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낸 핵심 이념 관료였다. 1961년 스탈린 시신의 마우솔레움 철거를 직접 발의한 탈스탈린화의 주역이었으나, 브레즈네프기 문화장관으로서는 보수적 통제를 행사했다.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글라주노프·솔로우힌 같은 향토주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복합적 면모를 지녔으며, 소련 말기까지 문화·이념 영역의 핵심 관리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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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모스크바 당 조직과 중앙위 선전 라인에서 성장
  • 1961–1974중앙위 서기, 이념·문화 담당으로 해빙 이후 문화통제 관리
  • 1974–1986문화장관, 정체기 공식 예술·공연·출판 행정 총괄
  • 1986 이후고르바초프기 문화정책 변화 속에서 중앙 무대에서 물러남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쿠노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кун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19–1989 ○ 자연사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서 연방회의 의장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의 공보 엘리트이자 최고 입법기관의 얼굴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잡자, 톨쿠노프는 한때 중앙위에서 함께 일했던 그에게 신문 복귀를 요청했다. 안드로포프는 『프라우다』를 제안했지만 톨쿠노프는 『이즈베스티야』를 택했다.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프라우다』 기자로 출발한 소련의 언론인·국가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특파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고, 1960년대 초부터 CPSU 중앙위원회 사회주의국가연락부에서 근무하며 당의 대외 선전 라인을 관리했다. 1965년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 취임해 11년간 신문을 이끌었고, 1976년 노보스티 통신사 사장으로 전출된 뒤 1983년 안드로포프 집권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로 복귀했다. 1984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8년까지 재임하며 입법부의 제도적 수장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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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프라우다』 정보부 기자 → 문예담당, 주필 보좌관
  • 1941–1944전쟁 특파원 (칼리닌·북서·브랸스크·제4우크라이나·제2벨로루시 전선)
  • 1946–1947, 1951–1957『프라우다』 근무
  • 1957–1965CPSU 중앙위 기구 → 사회주의국가 공산·노동자당 연락부 차장·제1차장
  • 1965–1976『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76–1983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3–198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재임)
  • 1984–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유리 안드레예비치 즈다노프

Юрий Андреевич Ждан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인 1919–2006 ○ 자연사

스탈린의 사위, 리센코를 비판했다 굴복한 과학 관료에서 로스토프 대학의 설계자로

정치국에서 스탈린이 유리 즈다노프에게 던진 말: "뭐라고, 리센코가 우리 농업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모르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이자 스탈린의 사위였던 유리 즈다노프는 1947년 28세의 나이로 중앙위원회 과학부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기 과학 정책의 핵심 관료가 되었다. 1948년 4월, 리센코의 이론을 공개 비판하는 강연으로 스탈린의 분노를 샀고, 정치국에서 질책을 들은 뒤 《프라우다》에 굴복의 편지를 발표해야 했다. 1950년에는 유대인 과학자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가담했으나, 스탈린 사후 로스토프 국립대학 총장(1957–1988)으로 31년간 재임하며 이 지방대학을 소련 최상위권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800여 편의 논문을 남겼고, 말년에는 북카프카스 과학센터를 이끌며 과학행정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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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붉은 군대 총정치국 교관·선전문필원
  • 1947–1948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선전선동국 과학부장
  • 1948–1950중앙위 선전선동국 과학섹터장
  • 1950–1952중앙위 과학·고등교육부장
  • 1952–1953중앙위 자연·기술과학·고등교육부장
  • 1952–1956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53–1957로스토프 국립대학 조교·부교수·교수, 로스토프 주당위 과학문화부장
  • 1957–1988로스토프 국립대학 총장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

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Сахар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1–1989 → 유형 1980

수소폭탄을 만들고, 체제에 등을 돌린 물리학자

1986년 12월 16일, 고리키의 감시 아파트에 전화가 놓인 지 하루 만에 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는 고르바초프였다. "모스크바로 돌아오십시오." 사하로프는 감사 인사와 동시에 정치범 석방을 꺼냈다. 7년 가까운 유형을 끝낸 그 순간에도 그는 양심의 의제를 내려놓지 않았다.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이자 32세의 최연소 정회원 원사(院士) — 그리고 그 모든 특권을 내려놓은 반체제의 양심. 1968년 프라하 진압 즈음 체제와 공개적으로 갈라섰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다 1980년 고리키로 유형당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의 전화 한 통으로 돌아와, 인민대의원 자격으로 연단에서 싸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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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53수소폭탄 개발 참여, 1953년 실험 성공
  • 195332세에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1대기권 실험 반대를 흐루쇼프에게 직접 진언
  • 1968『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 지하 유통
  • 1975노벨평화상(출국 불허, 아내가 대리 수상)
  • 1980–86고리키 유형
  • 1989인민대의원, 12월 사망

빅토르 그리고리예비치 아파나시예프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Афанасье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인 1922–1994 ○ 자연사 (암)

프라우다 최장기 편집장이자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수문장

그는 우리 역사의 더러운 빨래를 들추어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출신으로,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아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최종 수문장으로 군림했다. 재임 중 《프라우다》 발행부수는 1,060만 부로 정점을 찍었고, 소련 언론인연맹 의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겸하며 당의 공식 입장을 신문 지면에 충실히 구현했다. 1989년 옐친의 음주 의혹을 다룬 이탈리아 기사를 전재했다가 사상 초유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임되었으며, 이는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구시대적 편집 노선이 붕괴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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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3적군 복무, 공수부대 및 SMERSH 방첩 장교
  • 1953–1960첼랴빈스크 사범대학 철학 강사·학과장
  • 1960–1968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 1968–1974《프라우다》 부편집장·제1부편집장
  • 1974–1976《콤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9《프라우다》 편집장 (역대 최장기)
  • 1976–1990소련 언론인연맹 의장, 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0–199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주임연구원

레오니트 미트로파노비치 자먀틴

Леонид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мятин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2–2019 ○ 자연사

브레즈네프 체제의 정보 설계자

자먀틴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미국은 세계 헌병 역할에 나서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며, 하피줄라 아민이 CIA 요원이었다는 주장을 소련 고위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 제기했다. — FRUS, 1980년 1월 28일

소련의 외교관이자 당 선전 책임자로, TASS 사무총장과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을 거치며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해외 정보·선전 체계를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의 집필진을 이끌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주영 대사로 부임했다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냉전기 소련의 대외 이미지와 정보 통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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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6모스크바 항공대학·고등외교학교 졸업, 외무부 입부
  • 1946–1962외무부에서 UN·IAEA 대표부 근무, IAEA 상임대표 역임
  • 1962–1970외무부 공보국장, 대외 발표와 언론 브리핑 총괄
  • 1970–1978TASS 사무총장, 소련 공식 통신사의 수장
  • 1978–1986중앙위 국제정보부장, 당의 대외 선전·정보 활동 총괄
  • 1978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 집필진 지휘, 레닌상 수상
  • 1986–1991주영 소련 대사, 8월 쿠데타 규탄 거부로 해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Яковле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3–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이념 담당이 이념을 해체하다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캐나다 대사 10년차의 주의를 내던졌다. "어째서인지 나는 조심을 집어던지고 그에게 외교 문제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산책이 끝날 무렵, 두 사람은 체제 개혁의 동지가 되어 있었다.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상이군인이자 당 선전부의 엘리트. 러시아 민족주의를 비판한 논문으로 캐나다 대사 10년의 「유배」를 살았고, 그곳에서 시찰 온 고르바초프를 만났다. 정치국의 이념 담당으로 글라스노스트와 역사 재심을 밀어붙였고, 말년에는 비밀 의정서와 숙청 문서의 공개·복권 작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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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43전선 복무 중 중상
  • 1953–72중앙위 선전부에서 성장
  • 1972–83반민족주의 논문 파문으로 캐나다 대사 10년
  • 1983–85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
  • 1985–90선전부장, 정치국원: 글라스노스트 설계
  • 1989–2000s비밀 의정서 조사위원장, 이후 복권위원회 위원장

에발트 바실리예비치 일리옌코프

Эвальд Васильевич Ильенк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4–1979 ✕ 자살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변증법적 논리를 발굴한 소비에트 유럽인

“관념론은 순진한 학생이 유령을 상상한 기본적인 실수가 아니다. 관념론은 이상적 형식의 객관성 — 개인의 의지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 문화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 — 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다.” — 『이상적인 것의 변증법』, 1976년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유를 남긴 철학자. 『자본』의 논리에서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정식화했고, '이상적인 것'이 개별 뇌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언어·기호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활동의 형식임을 논증하여 격렬한 학술 논쟁을 촉발했다. 빌헬름 다비도프의 발달교육 이론과 메시체랴코프의 자고르스크 농맹아 실험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주저 『변증법적 논리』(1974)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인식론에서 문화철학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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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포병소위, 제1·2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까지 진격
  • 1950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우등 졸업, 대학원 진학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종신)
  • 1955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주의'로 교수직 박탈
  • 1960『『자본』에서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 출간
  • 1962「철학백과사전」에 「이상적인 것」 논문 발표
  • 1968박사학위 논문 통과, 『우상과 이상에 관하여』 출간
  • 1974주저 『변증법적 논리: 역사와 이론』 출간

카렌 네르세소비치 브루텐츠

Карен Нерсесович Брутенц
이념 · 선전 소련 아르메니아 1924–2017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제3세계 정책을 설계한 국제부 이론가

브루텐츠와 국제부 전문가들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견을 전달할 부서장 포노마료프는 중대한 12월 회의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이론가. 바쿠에서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역사학으로 전환, 1958년 '신식민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중앙위 국제부에서 활동하며 '민족민주주의' 개념을 정립하는 특별작업반을 이끌었고, 제1부부장으로 승진해 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시기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 당시 내부에서 반대 의견을 냈으며,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회고록 『스타라야 광장에서의 30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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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바쿠 정신병원 의사
  • 1950–1954바쿠 시당 위원회 강사
  • 1954–1958사회과학아카데미 대학원생, 1958년 학위 취득
  • 1961–1969『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민족해방운동부장
  • 1961–1976중앙위 국제부 책임직, 제3세계 정책 기획
  • 1976–1986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1986–1990중앙위 후보위원
  • 1997–2017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

유리 표도로비치 오를로프

Юрий Фёдорович Орл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4–2020 → 국적 박탈 · 강제 추방 1986

소련이 서명한 헬싱키 인권 약속을 내부에서 감시한 물리학자

1978년 5월 폐쇄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말했다: "이런 재판으로는 헬싱키 그룹의 문서가 증언하는 사회의 병폐와 결함을 없앨 수 없습니다."

입자가속기 물리학자에서 소련 최초의 인권감시 조직을 세운 반체제 운동가로 선 인물. 1956년 당 회의에서 스탈린과 베리야를 '권력을 쥔 살인자'라 칭해 제명·해고당했고,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6년 5월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 이행을 감시하는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을 창립했다. 이는 소련 스스로 서명한 제3바스켓의 약속을 내부에서 뒤집어 맞대결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2월 체포되어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을 선고받고, 1986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미국으로 추방되어 코넬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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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56보안 원자력 연구소(훗날 이테프) 물리학자
  • 1956스탈린·베리야를 격렬히 비판, 당 제명과 해고
  • 1956–72예레반 물리연구소, 1963년 이학박사
  • 1968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3소련 최초 국제앰네스티 그룹 창립 참여
  • 1976.5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창립, 초대 의장
  • 1977–86체포,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 선고
  • 1986국적 박탈·미국 추방, 코넬대 교수

바딤 발렌티노비치 자글라딘

Вадим Валентинович Загладин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7–2006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유로코뮤니즘 대화의 얼굴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인물은 포노마료프의 제1부부장 바딤 자글라딘이었다. 사냥 트로피를 선물받고, 공식 사진에서 항상 총비서 바로 뒤에 자리했다." —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시코프

중앙위 국제부에서 24년, 그중 13년을 보리스 포노마료프 아래 제1부부장으로 지내며 서유럽 공산당을 상대한 소련의 핵심 창구였다. 유로코뮤니즘 시대에 미테랑, 브란트, 나폴리타노와 교류하며 사회민주주의에 수렴하는 개혁된 공산주의를 주창했고, 고르바초프 '신사고' 외교의 이론적 토대를 이반 프롤로프와 함께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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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후 동 대학에서 교편
  • 1954–1964《노보예 브레먀》 및 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저널리스트
  • 1964–1967중앙위 국제부 고문(콘술탄트)
  • 1967–1975중앙위 국제부 부부장
  • 1975–1988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포노마료프 아래 서유럽 공산당 관계 총괄
  • 1988–1991미하일 고르바초프 고문
  • 1992–2006고르바초프 재단 고문, 유럽대서양협력협회 부회장

바딤 안드레예비치 메드베데프

Вадим Андреевич Медведе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9–2025 ○ 자연사

이념을 해체한 마지막 이념비서: 검열의 특별보관고를 열고 당의 정통 교리를 폐기하다

1988년 가을, KGB를 통해 솔제니친 전 작품을 입수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정했지만 〈수용소 군도〉는 주관적 논쟁서라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특별보관고를 열어 솔제니친의 기출판 저작을 모두 일반 서가로 돌려보냈다.

야로슬라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가치법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당 엘리트. 중앙위 선전부와 과학·교육부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 1988년 정치국원 겸 이념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즈다노프의 1946년 문예지 탄압 결의를 폐기하고, 정기간행물 구독 제한을 철폐했으며, 솔제니친과 트로츠키의 저작을 포함한 특별보관고 도서를 일반 서가로 되돌렸다. 대학에서 당사와 과학적 공산주의 강좌를 20세기 사회정치사로 대체했고, 스탈린 시대 탄압 재심의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모든 공직을 떠나 고르바초프 재단 연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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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68레닌그라드 대학 경제학부 졸업, 교수, 경제학 박사
  • 1968–70레닌그라드 시당 서기
  • 1970–78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78–83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
  • 1983–86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1986–90중앙위 서기, 이후 이념위원회 의장·정치국원
  • 1990–91소련 대통령자문회의 위원
  • 1992–2025고르바초프 재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연구원

리차르트 이바노비치 코솔라포프

Ричард Иванович Косолап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30–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발전된 사회주의' 교리의 주요 설계자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이 시작한 뻬레스트로이까는 필연적 실패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그는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사회철학자이자 이론가로, 1976년부터 1986년까지 CPSU의 핵심 이론지 《꼼무니스트》의 편집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식 이념인 '발전된 사회주의' 개념을 체계화한 주역으로, 소련이 사회주의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으며 공산주의로의 급속한 이행보다는 장기적 공고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그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아나톨리 부텐코, 알렉산드르 찌쁘꼬 등 개혁 성향 이론가들과 충돌했고, 고르바초프가 뻬레스트로이까를 개시하자 가장 먼저 숙청 대상이 되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의 실패를 예측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가며 스탈린 전집의 속간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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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55–1958브랸스크주 콤소몰 위원회
  • 1958–1959아르마비르 사범대학 강사
  • 1961–1964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강사
  • 1966–1974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장
  • 1974–1976《쁘라우다》 제1부편집장
  • 1976–1986《꼼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6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
  • 1979–1987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타지크 SSR)
  • 1986–201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교수 · 주임연구원
이념 · 선전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40–2022 ○ 자연사

빌뉴스 1월 사태에서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한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 이념서기

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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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소련공산당 입당
  • 1970–1990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당역사연구소 연구원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이념부장
  • 1994–2002반국가 활동 혐의로 수감 (8년형)
  • 2002–2012러시아국립사회대학 교수, 공산당연합-CPSU 평의회 부의장

바간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랸

Ваган Григорьевич Григорьян
이념 · 선전 소련 아르메니아 1901/1902–1983 ○ 1983년 자연사

스탈린 말기 국제공산운동을 관리한 아르메니아 출신 당 간부

1953년 8월, 중앙위원회 간부 데도프는 흐루쇼프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리고랸의 동료들이 그와 베리야의 '가까운 관계'를 지적했다고 보고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마을에서 태어난 그리고랸은 군대 신문 편집자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당 기관의 출판·선전 책임자로 올라섰다. 1949년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대외정책위원회(국제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과 전 세계 공산당 간 관계를 총괄했다. 그의 재임기는 코민포름 창설 이후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별이 심화되고 중국 혁명이 승리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와 겹친다. 1952년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이후 측근으로 지목되어 중앙위원회에서 제외되고 외교부로 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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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4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원회 출판부장, 군대 신문 편집
  • 1924–1927모스크바 하모브니키 구당위 출판부장, 모스크바 시당위 출판부장
  • 1927–1933트빌리시에서 「라보차야 프라우다」, 「프롤레타르」, 「나 루베제 보스토카」 편집
  • 1933–1946트빌리시 「자랴 보스토카」 편집장
  • 1946–1947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중앙신문부장
  • 1947–1949코민포름 기관지 「항구적 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 부편집장
  • 1949–1953중앙위원회 대외정책위원회 위원장 (국제부장)
  • 1952–1954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3소련 외교부 콜레기야 위원 및 국장, 아자리야自治공화국 중앙위원회 전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