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4월 3일 밤,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사랑하는 동지들, 군인·수병·노동자들이여!」라고 외쳤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로 끝맺은 그 순간, 당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1917년 4월에는 모두가 미쳤다던 테제로 당을 뒤집었고, 10월에는 봉기를 밀어붙였으며, 1918년 브레스트에서는 회의실에서 가장 신중한 후퇴파였고, 1921년에는 네프로 다시 후퇴했다. 확신과 유연함의 그 결합은 복제되지 못했다. 1922년부터 뇌졸중이 그를 삼켰고, 마지막 구술은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옮기라는 경고였다. 경고는 봉인되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렸을 때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 길고 무거운 침묵.
1917년에는 조연이었고 1924년에는 위험해 보이지 않는 서기장이었다. 그 「실무」, 곧 인사권이 권력의 본체임을 라이벌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집단화와 공업화, 대숙청과 굴라크, 그리고 전쟁의 승리가 모두 한 장부에 적혀 있다. 1953년 뇌일혈로 쓰러졌을 때, 곁의 누구도 감히 먼저 의사를 부르지 못했다.
1956년 11월 18일,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을 향해 —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스탈린의 궁정에서 광대 역까지 견디며 살아남았고, 1956년 비밀연설로 관 뚜껑을 열었다. 헝가리를 진압했고, 쿠바에서 물러서 세계를 구했으며, 그 후퇴의 값으로 1964년 동료들에게 해임당했다. 실각 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그들이 나를 총살이 아니라 표결로 보낼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나의 업적이다.」
우즈베크 공산당 초대 우즈베크인 제1서기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끌고 대숙청에 희생된 중앙아시아 볼셰비키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우즈베키스탄을 건설한 이크라모프는 조작된 죄목을 자백하며 이 말을 남겼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르가나·시르다리야에서 당 기관을 이끌며 반혁명 세력 진압에 참여했고, 1921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서기가 되었다. 1924년 중앙아시아 민족 획정에서 공화국별 분할을 지지하며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29년 제1서기로 임명되어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화를 이끌었고, 1934년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전연방 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37년 '경계심 부족'으로 해임·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후 총살되었다.
1979년 10월 7일, 동독 30주년 기념식. 브레즈네프가 호네커와 나눈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는 베를린 장벽의 가장 유명한 벽화가 되었다.
흐루쇼프를 밀어낸 「안정」의 얼굴. 프라하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냈고, 국내에서는 아무것도 흔들지 않았다: 간부들은 종신이 되었고, 문제들은 이월되었다. 말년의 훈장 수집벽과 노쇠는 농담의 소재가 되었지만, 그 18년의 청구서는 후임들에게 넘어갔다. 그의 장례식은 정체(застой) 그 자체의 장례식으로 기억된다.
1964년 자신의 저서 《역사적 유물론》에서 스탈린의 테제를 정면으로 논박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을 사회주의 전 기간으로 확장하는 독단주의자와 분파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 격화에 관한 스탈린의 잘못된 명제를 공유하고 있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당 이데올로그. 역사적 유물론과 게르첸의 세계관을 전공했으며, 1948년 출간된 《게르첸의 세계관》으로 1951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9년부터 《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1952년에는 중앙위 철학·역사부장과 이론지 《꼼무니스트》 편집장을 겸하며 스탈린 말기 이념 기구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상임위원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다음 날인 1953년 3월 6일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고리키 주당 간부와 국가방송위원장을 거쳐 모스크바 대학에서 역사적 유물론 강좌를 이끌었고, 1964년 자신의 저작에서 스탈린의 계급투쟁 격화 테제를 공개적으로 논박했다.
체르넨코 장례식 전날 밤,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 살 수는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크림 연금에서 돌아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된 직후 중앙위원회에서 한 연설: "우리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계공학자 출신으로 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테크노크라트였다. 1976년 당 관료로 전환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쳤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해 수습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고르바초프의 신임 속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이듬해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당 활동이 금지되면서 사임했다.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과 경제정책위원장을 지내며 구 공산당 계열 정치세력의 재편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