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1991

국가원수

최고소비에트와 대통령직으로 이어진 공식 국가대표 직함.

지도부 타임라인

  1. 1922–1946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중앙집행위원회 ·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2. 1946–1953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시베르니크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3. 1953–1960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4. 1960–1964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5. 1964–1965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6. 1965–1977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7. 1977–1982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8. 1983–1984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9. 1984–1985 콘스탄틴 우스티노비치 체르넨코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10. 1985–1988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그로미코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11. 1988–1991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최고소비에트 의장 · 대통령

소속 인물

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국가원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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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보르찰리현 키질-아질리 마을 교사
  • 1891–1902바쿠 사립 김나지움 교사, '나리마노프 독서실' 설립·운영 (1894)
  • 1895–1899희곡 「무지」(1895), 소설 「바하두르와 소나」(1896), 비극 「나디르 샤」(1899) 발표, 고골의 「검찰관」 번역·공연 (1896)
  • 1905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훔메트' 가입
  • 1908노보로시스크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 면허 취득
  • 1909–1914체포되어 아스트라한으로 5년 유배, 그곳에서 의사·연극인·민중대학 평의회 의장으로 활동
  • 1917바쿠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신문 「훔메트」 편집자
  • 1918바쿠 인민위원회 도시경제 담당 인민위원
  • 1919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동부장
  • 1920–1922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의장, 외무인민위원 겸임 (1920–1921)
  • 1922자카프카스 SFSR 연방평의회 의장 (3월~12월), 제노바 국제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2–1925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중 1인
  • 1923–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875–1946 ○ 자연사

소련의 장기 공식 국가원수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 칼리닌은 무장도 없이 아내와 함께 요새로 들어가 수병들을 설득하려 했다. 박수로 시작된 그의 연설은 곧 야유에 묻혔고, 그는 침묵 속에 크론슈타트를 떠났다.

농민 출신 볼셰비키로 1919년부터 1946년 사망까지 소련의 공식 국가원수를 지냈다. '전연방의 장로'로 불리며 민중의 탄원을 받고 문맹 퇴치 운동을 이끄는 등 체제의 인간적 얼굴 역할을 했으나, 대숙청의 법적 토대가 된 테러사건 신속처리법령에 서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실권은 없었지만 27년간 소비에트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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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46중앙집행위원회 ·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아벨 사프로노비치 예누키제

Авель Сафронович Енукидзе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877–1937 ✕ 처형

스탈린의 절친이자 17년간 소비에트 국가기구의 중추, 대숙청의 서막을 연 최초의 몰락

「소소, 그들도 나처럼, 너처럼 늙은 볼셰비키야. 늙은 볼셰비키의 피를 흘리지 않을 거지!」 예누키제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재판에 세워 처형하려는 스탈린을 말렸다. 스탈린은 답했다. 「기억해, 아벨.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적이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바쿠 사회민주주의 조직과 코카서스 지하인쇄소 「니나」의 공동 창립자. 1918년부터 1935년까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와 소련 중앙집행위원회(TsIK) 서기로 17년간 소비에트 국가 최고 형식기관의 실무를 관장하며 연방 형성과 제도화를 뒷받침했다. 스탈린의 측근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대부였고, 개인으로서는 최초로 레닌 훈장(제3호)을 받았다. 1935년 「크렘린 사건」으로 제17차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중 처음으로 축출되었으며, 이는 대숙청의 중요한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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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바쿠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 1901–1906코카서스 지하인쇄소 「니나」 공동 설립·운영
  • 1902–19147차례 체포, 크레스티·메테히 성·오네가·투루한스크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참여
  • 1918–1922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 1922–1935소련 중앙집행위원회(TsIK) 서기
  • 1932개인 최초 레닌 훈장(제3호) 수훈
  • 1935/1959중앙위원 제명·출당, 1937년 체포·처형, 1959년 복권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페트롭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ский
국가원수 소련 우크라이나 1878–1958 ○ 자연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원수, 드니프로페트롭스크의 이름이 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1915년 2월, 차르 법정은 페트롭스키에게 모든 권리 박탈과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반전 연설을 한 노동자 의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하리코프현 재단사의 아들로 열한 살부터 노동한 볼셰비키다. 국가두마 노동자 의원(1912)으로 반전 연설로 유형되었고, 10월 혁명 후 내무인민위원으로 체카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으나 1939년 해임되어 혁명박물관 부관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1926년 그의 이름을 따 드네프로페트롭스크가 되어 2016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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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예카테리노슬라프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가담,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0–1903두 차례 체포·투옥, 1905년 예카테리노슬라프 소비에트 서기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노동자 의원, 32회 연설
  • 1914–1917반전 활동으로 체포,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
  • 1917.11–1919.03내무인민위원: 체카 창설 참여, 적색 테러 지령 서명
  • 1919–1938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
  • 1922–19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우크라이나 대표)
  • 1926–1939정치국 후보위원
  • 1939–1940모든 직위에서 해임, 1년간 실직
  • 1940–1958모스크바 혁명박물관 부관장

표도르 세르게예프 (아르툠 안드레예비치 동지)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Сергеев
국가원수 러시아 러시아 1883–1921 ✕ 사고사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설자이자 수반, 스탈린의 절친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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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바시키르 전권위원, '검은 독수리' 봉기 진압, 모스크바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0–1921전러시아 광산노동자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국제광산노동자조합 조직

알렉세이 예고로비치 바다예프

Алексей Егорович Бадаев
국가원수 소비에트 러시아 1883–1951 ○ 자연사

두마 의원에서 러시아 공화국 명목상 국가원수가 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

전쟁이 발발하자 바다예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두마 의원들은 전쟁 차관에 반대표를 던졌고,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전쟁을 타도하라! 전쟁에 맞서 전쟁을!」이라는 첫 반전 선언문을 배포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자물쇠공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바다예프는 제4대 국가두마의 볼셰비키 의원이자 레닌의 지시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을 맡아 의원 면책특권을 신문의 법적 방패로 삼았다. 1914년 반전 활동으로 투루한스크에 유배되었다가 2월 혁명 후 귀환하여 페트로그라드와 북부 지역의 식량 공급을 책임졌다. 스탈린 시기에는 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과 식품공업 인민위원을 거쳐 1938년부터 전시 기간 내내 러시아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했다. 볼셰비키 두마 의원 시절을 기록한 회고록 《국가두마의 볼셰비키들》(1929)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의 바다예프 창고는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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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의원 · 《프라우다》 공식 발행인
  • 1914–1917투루한스크 유배
  • 1917–1920페트로그라드·북부 지역 식량 공급 인민위원
  • 1930–1935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
  • 1935–1937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
  • 1937–1938러시아 식품공업 인민위원
  • 1938–1944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부의장
  • 1943–1951글라브피보(맥주공업총국) 국장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시베르니크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Шверник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888–1970 ○ 자연사

스탈린 말기의 공식 국가원수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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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노동조합과 당 행정에서 성장
  • 1938–1946민족소비에트 의장, 스탈린기 공식 연방대표제의 한 축
  • 1946–195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명목상 국가원수
  • 1953–1956스탈린 사후 노조·국가 행정 원로로 이동
  • 1956 이후당통제위원회 등에서 복권·징계 문제에 관여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체르뱌코프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Червяков
국가원수 소련 벨라루스 1892–1937 ✕ 자살

벨라루스 소비에트 국가성의 건설자, 스스로 총구를 겨눈 연방의 설계자

1937년 6월 16일, 당 대회에서 '인민의 적' 색출이 미흡하다고 공개 비난받은 체르뱌코프는 휴회 중 자신의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당국은 '가정사'라고 발표했다.

1919년 BSSR 수립 선언문에 서명하고 이듬해부터 초대 정부수반 겸 국가원수로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소련 중앙집행위 공동의장, 벨라루스화 정책 주도. 1937년 대숙청 와중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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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5빌렌스크현에서 농촌 교사로 근무, 빌렌스크 교원대학 졸업 (1915)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1916), 소위
  • 1917.5RSDLP(볼셰비키) 입당, 벨라루스 사회민주노동당 창당 지도부 참여
  • 1918.1–6러시아 SFSR 민족문제인민위원부 벨라루스 담당 인민위원 (벨나츠콤)
  • 1919.1벨라루스 임시혁명노농정부 위원으로 BSSR 수립 선언문 서명; 리트벨 SSR 교육인민위원
  • 1920–1924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초대) 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2–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칼리닌·페트롭스키·나리마노프와 4인 체제)
  • 1924–1937벨라루스 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Анастас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국가원수 소련 아르메니아 1895–1978 ○ 자연사

소련의 식탁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일리치에서 일리치까지」의 협상가

1942년 11월 6일 오후,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이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세 발을 쐈다. 그는 한 점 상처 없이 걸어나왔다.

반세기 동안 소련의 먹고 사는 일을 관장한 실무의 거장. 식품공업인민위원으로서 1936년 두 달간 미국의 공장들을 시찰하고 돌아와 통조림·소시지·냉동식품 산업과 대량생산 아이스크림을 이식했고(「미코얀 커틀릿」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이후 수십 년간 대외무역과 소비재 공급을 맡았다. 정치에서는 1956년 헝가리 무력 개입에 거의 홀로 반대했고, 쿠바 위기 뒷수습으로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3주간 설득했다. 「일리치(레닌)에서 일리치(브레즈네프)까지」 최고 지도부를 통과하고 은퇴를 「허락받은」 드문 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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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 1934–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 1938–49대외무역인민위원, 전시 렌드리스 수령 총괄
  • 1953–64무역·소비재 담당 부총리, 흐루쇼프의 해빙 지원
  • 1956/1962헝가리 개입 반대, 아바나에서 카스트로 설득
  • 1964–65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명목상 국가원수), 이후 은퇴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이그나토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Игнатов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901–1966 ○ 자연사

흐루쇼프를 구하고, 흐루쇼프를 무너뜨린 크렘린의 두 얼굴

1964년 가을, 이그나토프가 자신의 다차에서 고주파 전화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논의하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창가에 서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경호원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에게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웃어넘겼다. «그 애송이들이 나한테 맞서? 말도 안 돼!»

목수 아들로 태어나 체카-OGPU에서 11년 복무하고 대숙청 시기 쿠이비셰프 당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조직해 반당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했고, 그 대가로 중앙위 서기와 당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이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에게 밀려나자 1964년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돌아서 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다.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서 해빙기 최고 권력투쟁의 양면에 모두 깊이 관여한 역설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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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 및 붉은군대 복무
  • 1921–1932체카-OGPU에서 돈 지역 및 중앙아시아 근무, 바스마치 진압 참여
  • 1937–1940쿠이비셰프 주당위 제1서기, 포스티셰프 공격으로 부상
  • 1943–1948오룔 주당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운동 지휘
  • 1949–1952크라스노다르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1953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후보위원, 소련 조달장관
  • 1955–1957보로네시·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 '고리키식 주택건설' 추진
  • 1957–1960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
  • 1959, 1962–1966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조달위원회 의장
  • 1964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오르가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рганов
국가원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1–1982 ○ 자연사

NKVD 트로이카에 이름을 올렸던 러시아 공화국 국가원수

1937년, 야로슬라블 주당 제2서기 대행이던 오르가노프는 NKVD 특별트로이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법정도, 변호도, 항소도 없는 세 사람의 서명이 곧 사형선고였다.

니콜라이 오르가노프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러시아 공화국의 국가원수로 활동한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5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후 프리모르스키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당 제1서기를 거쳐 당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대숙청 시기인 1937년에는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식재판과 즉결처형에 가담했으며, 이는 훗날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인물의 전력으로서 냉혹한 모순을 남겼다. 흐루쇼프 시기 말에는 불가리아 주재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산하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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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붉은 군대 복무
  • 1924–1925유리예프-폴스키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4–1937네코우스키 구당위원회 제1서기 (야로슬라블 주)
  • 1937–1938야로슬라블 주당위원회 제2서기 대행 ·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
  • 1943–1947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3서기 → 제2서기
  • 1947–1952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8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8–1959RSFSR 각료회의 부의장
  • 1959–1962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61–1962RSFSR 담당 CPSU 중앙위원회 뷰로 위원
  • 1963–1967주불가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3CPSU 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Кузнецов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901–1990 ○ 자연사

세 번의 권력 공백기를 메운 임시 국가원수, 그로미코의 22년 1차관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직후, 81세의 쿠즈네초프는 임시 국가원수로서 소련 국민에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안드로포프체르넨코가 연이어 사망할 때마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며 말년 소련 권력 이양의 얼굴이 되었다.

농민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노조 중앙평의회 의장을 거쳐 소련 외교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외무부 제1차관으로 22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밀협상, 중소 국경교섭, 유엔 군축외교를 이끌었다. 1977년 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이 된 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사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권력 공백기마다 임시 국가원수를 지내며 말년 소련을 상징하는 원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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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마케옙카 제철소 연구기사·평로공장장
  • 1931–1933카네기공과대학 연수 (미국)
  • 1937–1940중공업인민위원부 기술국장·주임기사
  • 1940–1944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44–1953전소비에트노조 중앙평의회 의장
  • 1953주중 소련 대사
  • 1955–1977소련 외무부 제1차관
  • 1977–1986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국가원수 소련 우크라이나 1903–1983 ↓ 실각 1977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부의 국가원수

1965년 바쿠 연설에서 중공업 편향을 공개 비판했다가 수슬로프로부터 '수정주의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는 평생 후회할 한 방의 반격이었다.

우크라이나 제당공업 기술관료에서 당 제1서기로 성장해 1964년 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실질적 주동자가 되었고, 이후 브레즈네프·코시긴과 함께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룬 정치가. 국가원수로서 경공업·소비재 우선의 경제 노선을 주장하며 브레즈네프와 각을 세웠다. 1977년 정치국에서 축출되며 브레즈네프 1인 지배의 완성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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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야스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Яснов
국가원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6–1991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러시아 공화국의 20년짜리 국가원수

“그에게는 단호한 행정가의 손길이 있었고, 건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 동시대인의 평가

가죽 공장 노동자와 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으로 출발한 미하일 야스노프는 소비에트 체제가 길러낸 행정 실무자였다.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1950–1956)으로서 스탈린식 고층건물 완공, 남서부 주택단지 착공, 지하철 대순환선 개통 등 제2차 모스크바 재건계획을 진두지휘했으며, 주택 건설량을 두 배로 늘렸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고, 1966년부터 1985년까지 19년간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임회의 의장으로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형식적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방어선 구축을 지휘한 건설 전문가로서,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칠지만 확실한 행정 수완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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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인민위생위원회 배달원
  • 1922–1928가죽 공장 노동자
  • 1925모스크바국립대 노동자학부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 1928–1930붉은 군대 복무
  • 1930–1938모스크바 건설 신탁 관리직 역임
  • 1938–1949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1942년부터 제1부의장), 모스크바 전투 시 방어선 구축 지휘
  • 1949–1950소련 도시건설부 차관
  • 1950–1956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 연방회의 의장(1950–1954) 겸임
  • 1956–1957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7–1966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66–1985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상임회의 의장 (공화국 국가원수)
  • 1976사회주의 노동 영웅 수훈

미하일 포르피리예비치 게오르가제

Михаил Порфирьевич Георгадзе
국가원수 소비에트 그루지야 1912–1982 ○ 자연사

네 국가원수 아래 25년간 모든 소비에트 법령에 공동 서명한 제도적 닻

1982년 11월 23일, 브레즈네프 사망 13일 만에 최고회의 회의장에 참석했다가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25년의 행정적 연속성이 한 순간에 끊어졌다.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무회 서기(1957–1982)로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 네 명의 국가원수 아래 모든 법령에 공동 서명한 행정 중심축이다. 그루지야 농민 가정 출신으로 농업 공학을 전공했고, 조국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2서기와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거쳐 모스크바로 올라가 25년간 최고회의 상무회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1961–1982)로서 당과 국가 기구 사이의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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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51소련 농업부, 기술자에서 부서장까지 승진
  • 1941–1942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중상으로 퇴역, 적성훈장 수훈
  • 1951–1953그루지야 SSR 농업차관
  • 1953–1954그루지야 SSR 농업장관
  • 1954–1956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56–1957그루지야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7–1982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61–1982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밀리온시코프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Миллионщиков
국가원수 소련 러시아 1913–1973 ○ 자연사

핵무기를 만들고 핵군축을 외친 과학자-정치가

1968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소련 과학자의 입장에서 핵군축을 주창했지만, 동시에 쿠르차토프연구소에서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그로즈니 출신으로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에서 기체 원심분리법에 의한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세계 최초의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1964)의 과학적 책임자였다. 1962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소련 과학의 제도적·국제적 좌표를 설정했고, 1964년부터 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을 맡아 1968~1969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서 핵군축과 과학 협력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쿠르차토프연구소 부소장으로 핵기술 개발을 지휘하면서도 1967년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과학자와 정치가를 겸한 독특한 경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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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60제813콤비나트 부과학지도자 · 가스원심분리 농축
  • 1960–1973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연구부소장
  • 1962–1973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4세계 최초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 과학책임자
  • 1964–1973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
  • 1967–1973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68–1969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루키야노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Лукьянов
국가원수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30–2019 ↓ 체포 · 수감 후 사면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동창에서 비판자로: 소련 의회의 마지막 의장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내가 제5차 인민대표대회를 주재하면, 의원들이 8월 민주주의 승리의 모든 성과를 무효화할까 봐 두려워했다.” — 체포 이유에 대한 루키야노프의 설명.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헌법적 틀을 설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고르바초프의 대학 동기로 1977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 중앙위 총무부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1991)에 올랐다. 초기 개혁을 지지했으나 연방 해체를 우려하며 보수파로 돌아섰고, 1991년 8월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어 15개월 수감되었다. 석방 후 주가노프와 함께 러시아연방 공산당을 창당했고 2003년까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다. 법학 박사이자 '아나톨리 오세네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소비에트 제도에 끝까지 충성한 마지막 지식인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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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소련 각료회의 법률위원회 수석 컨설턴트
  • 1961–197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선임 레페렌트, 부서 부장
  • 1977–198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사무국장
  • 1983–1985CPSU 중앙위 총무부 제1부부장
  • 1985–1987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87–1988CPSU 중앙위 서기 (법률·행정 담당)
  • 1988–1990CPSU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1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3–2003러시아연방 국가두마 의원 (CPRF)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31–2007 ○ 자연사

전차 위에 올라간 남자

1999년 12월 31일, 신년사 생방송에서: "나는 떠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많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로 불러올린 지방 서기 — 그리고 그를 밀어낸 사람. 1987년 당 지도부를 정면 비판해 좌천되었다가 선거로 되살아났고, 1991년 8월 백악관 앞 전차 위에 올라선 사진 한 장으로 러시아의 권력이 되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 숲에서 소련을 서명으로 끝냈고, 1999년 마지막 연설에서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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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85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
  • 1985–87모스크바 당 제1서기: 특권 비판으로 인기
  • 1987지도부 정면 비판 후 해임
  • 1989–90인민대의원 압승,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의장, 탈당
  • 1991.6러시아 대통령(사상 첫 직선)
  • 1991.8/12쿠데타 저지, 벨라베자 합의 서명
  • 1999.12.31사임, 국민에게 사과

레오니트 마카로비치 크랍추크

Леоні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국가원수 소련 우크라이나 1934–2022 ○ 뮌헨에서 별세

공산당 선전가에서 시작해 소련을 서명으로 끝낸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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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70정치경제학 교사에서 체르니우치 주당 선전선동 부장까지
  • 1970–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서에서 승진
  • 1980–8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장
  • 1988–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이념 부장
  • 1989–90.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정치국원, 제2서기
  • 1990.7–1991.8우크라이나 최고소비에트 의장; 독립선언 주재
  • 1991.12–1994.7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 협정 서명, 쿠치마에 패배
  • 1994–2006인민대의원, SDPU(o) 원내대표

루슬란 이므라노비치 하스불라토프

Руслан Имранович Хасбулатов
국가원수 러시아 체첸계 1942–2023 ○ 1993년 체포, 1994년 사면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최고소비에트 의장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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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70–1990모스크바 국민경제연구소(플레하노프) 교수, 국제경제관계학과장
  • 1990.03그로즈니 선거구에서 RSFSR 인민대의원으로 선출
  • 1990.06–1991.10RSFSR 최고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91.07–1991.1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권한대행
  • 1991.10–1993.10RSFSR/러시아연방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4–2023플레하노프 러시아 경제대학교 세계경제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