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수로에서 세계 최대 가속기까지: ITEP의 23년 지휘자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7–1941 과학·기술 · 소련 ·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경력 연표
- 1927–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1941LFTI 양전자연구실장
- 1945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
- 1945–1968제3실험실 / ITEP 소장
- 1947–1951모스크바국립대 물리기술학부 물질구조학과장
관련 역사 사건
전시 이주와 아라가츠 우주선 연구, 예레반 물리연구소 설립(1941~1943)
1941년 여름 아브람 알리하노프는 당시 고에너지 입자의 유일한 원천이던 우주선을 파미르 산맥에서 연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접근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고, 1941년 10월 그는 물리문제연구소와 함께 카잔으로 이주했다. 1942년 4월에는 소련령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으로 옮겨 아라가츠 산에서 우주선을 연구하고자 했다.
아라가츠 원정은 연성 우주선 성분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에너지의 양성자 무리와 빠른 양성자의 흐름을 확인했다. 형제가 이끈 집단은 연성 성분의 이온화 능력이 알려진 조성으로 예상되는 수준보다 크다는 이상을 규명하려 했고, 이 결과는 이후 입자물리학이라는 새 분야의 발전을 자극했다. 우주선 자체의 연구사에서도 아라가츠의 측정은 1934년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집단의 동서 비등방성 측정으로 시작된 계보에 속하며, 1942년 형제의 원정이 그 연구를 본격화했다.
같은 시기 알리하노프와 동생 아르툼 알리하냔은 소위 '바리트론'이라 부른, 넓은 질량 스펙트럼을 가진 우주선 입자의 존재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서방에서 의문시되었고 소련 물리학자들의 비판을 받아 소련 물리학 잡지에서 격렬한 논쟁을 낳았으며, 공식적으로 결판나지 않은 채 소련 우주선 연구의 위신에 부담을 남겼다. 이는 확증되지 않은 채 남은 가설이었다.
1943년 두 형제는 예레반국립대학 부속 기관으로 예레반 물리연구소를 세웠고, 이후 아라가츠(해발 3,200m)와 노르 암베르드(2,000m)에 고산 우주선 관측소가 들어섰다. 이 기관은 훗날 아르메니아 물리학의 중심이 되었으며, 알리하노프의 동생 아르툼이 오랫동안 이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