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나시 니콜라예비치 마튜셴코

Афанасий Николаевич Матюшенко
혁명적 사회주의 러시아 제국 러시아(제정 러시아 신민). 사료에 따라 우크라이나인으로도 본다 1879–1907 ✕ 교수형

포툠킨 반란을 이끌고 1907년 세바스토폴에서 처형된 흑해함대 병참장

라콥스키는 1907년 회고록에서 1905년 콘스탄차에 정박한 포툠킨에 올랐을 때 마튜셴코가 자신을 맞이한 말을 전한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된 300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입니다.」 직접 인용이 아니라 라콥스키가 전한 회고다.

1879년 5월 2일 하르코프현 데르가치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1년 기근 뒤 학교를 그만두고 하르코프의 철도 급유공, 오데사 항만 노동자, 증기선 화부로 일했으며 로스토프나도누의 마르크스주의 학습회에 들어갔다. 1900년 11월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크론시타트 기뢰기관학교를 마치고 1902년 3월 건조 중이던 전함 포툠킨에 배속되었다. 1904년 11월 세바스토폴 라자레프 막사 봉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사면된 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도왔으나 당적은 갖지 않았다. 1905년 6월 14일(구력, 신력 6월 27일) 함상위원회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고, 망명 끝에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와 체포되어 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당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포툠킨 반란에서 처형까지

포툠킨 반란

1905년 6월 14일(구력, 신력 6월 27일) 상한 고기 문제로 함내가 들끓자 마튜셴코는 사령부에 고기 상태를 보고할 것을 요구한 수병들의 선두에 섰고, 전원의 점심 거부를 주장하며 수병들이 조리실에서 보르시를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그는 무장을 부르는 첫 목소리 가운데 하나였고, 봉기 첫날 함상위원회와 그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봉기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세바스토폴 자료는 승조원들이 배의 최고 권력 기관으로 함상위원회를 세우고 그를 의장으로 뽑았다고 적고, 그가 기뢰기관 1등 병참장으로 복무하다 곧 펠트펠벨(상사)로 승진했으며 수병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과 위신을 누렸다고 전한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6월 15일 오데사에서 증기선 베하 나포를 지휘했고, 6월 16일 체포한 장교들을 상륙시켰으며, 6월 17일 크리게르 제독 함대와 마주쳤을 때 지휘탑에서 배의 항로를 지휘했다. 마지막 날까지 오데사 상륙과 세바스토폴 항해를 주장하며 루마니아 인도에 반대했지만, 승무원 다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장교 사망 서술은 갈린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와 세바스토폴 자료는 그가 죽은 장교 일곱 명 가운데 다섯 명을 죽였다고 적고,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위키백과가 인용하는 V. A. 포세의 회고는 그가 봉기 중 자기 상관 두세 명을 손수 죽였다고 전한다. 루마니아 인도 시점도 충돌한다. 러시아어 위키백과 인물 문서는 1905년 6월 24일 인도로 적지만 달력 기준을 밝히지 않고, 같은 위키백과의 봉기 문서는 항해를 구력 6월 14일부터 6월 25일(신력 7월 8일)까지로 적으며, 우크라이나어 위키백과는 6월 25일(구력)=7월 8일(신력) 콘스탄차 인도를 적고, 브리태니커는 7월 8일만 제시한다. 브리태니커에 따르면 콘스탄차에서 보급을 받지 못한 배는 페오도시야로 갔으나 그곳에서도 보급 확보에 실패했다. 이 날짜와 결과는 각 출처에 귀속해 병기한다.

정치적 견해와 망명

러시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마튜셴코의 정치적 견해는 뚜렷하지 않았다. 한 사료는 그가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웠다고 보고, 다른 사료는 그를 아나르코-사회혁명당 성향의 수병으로 본다. 1905년 8월 제네바에서 가폰과 협의했고, 레닌, 고리키, 라콥스키, 포세를 만났으며, 볼셰비키·멘셰비키·사회혁명당·가폰의 권유를 모두 거절하며 자신은 모든 당 밖에 선다는 글을 사회혁명당 기관지 『혁명 러시아』 1905년 8월 1일자에 실었다.

라콥스키의 1907년 회고록은 흑해함대 전반의 봉기가 7월로 예정되어 있었고 예카테리나 2세 호에서 쏘는 로켓 두 발이 신호였다고 전하며, 상한 고기 사건이 계획보다 이른 고립된 반란을 불러일으켰다고 적는다. 망명 동선은 사료마다 다르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루마니아에서 일하다 1906년 3월 콘스탄차에서 체포·추방되었고, 스위스와 미국(1906년 6월~1907년 3월 싱어 공장 노동)을 거쳐 프랑스에 머물다 경찰 탄압을 피해 다시 스위스로 갔다. 리브콤의 닉 히스는 루마니아, 스위스에 이어 1906년 6월 런던(크로폿킨, 로커 등과 만남), 뉴욕 싱어 공장, 1906년 말 파리에서의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조직 활동, 1907년 6월 러시아 귀환의 순서를 제시한다.

귀국, 재판, 처형

1907년 6월 28일 그는 페도르첸코 명의의 여권과 폭탄을 가지고 오데사에 상륙해 러시아로 돌아왔고, 7월 3일 니콜라예프에서 체포되었다. 10월 16일 기소장이 제시되고 다음 날 재판이 열려 군적과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우크라이나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재판장은 백 명 규모의 호위로 둘러싸였고, 그는 변호인을 거부한 채 봉기의 책임을 모두 자신에게 돌리고 동지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으며 사면 청원도 내지 않았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변호인들이 10월 17일 선언의 정치범 사면이 그 이전 행위에 대한 사형을 폐지했다고 항의했다고 전한다. 형은 10월 20일 새벽 세바스토폴 감옥 마당에서 집행되었다. 흐로노.ru와 우크라이나어 위키백과는 구력 10월 20일을 신력 11월 2일로 병기하며, 러시아어 위키백과 인물 문서는 20일만 적고 달력 기준을 밝히지 않는다. 두 날짜는 같은 처형을 달력만 달리 적은 것이다.

국적 규정과 기념

국적 규정은 갈린다. 영어 위키백과는 우크라이나어 표기를 병기하면서도 그를 러시아 수병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도 민족 표지 없이 흑해함대 수병으로 서술한다. 흐로노.ru는 러시아 수병이라는 표현 없이 하르코프현 농민의 아들이자 흑해함대 수병이라고만 적는다. 우크라이나인 규정은 우크라이나어 위키백과가 지지하며, 그를 우크라이나 공인·정치 활동가이자 흑해함대 하사관으로 적고, 그가 우크라이나 민족·문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하르키우 우크라이나 학생 흐로마다에 속했다고 전한다. 러시아어 사료들은 이런 조직 가입을 전하지 않는다. 이 항목은 두 규정을 각 출처에 귀속해 밝히고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신분은 제정 러시아 신민이며, 망명 중 귀화를 기록한 사료는 없다.

소련 시기 참고문헌은 그가 용감하고 제정을 증오했으나 정치적 견해가 명확하지 않아 혁명적 지도자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세바스토폴 자료에 따르면 1925년 12월 19일 그는 세바스토폴 시 소비에트 명예 대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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