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밀워드

Alan S. Milward
영국 영국 1935–2010 ○ 사망

마셜 플랜 불필요론으로 전후 서유럽 부흥 서사를 뒤흔든 영국의 경제사학자

1947년의 위기를 그는 생산과 투자 붐의 힘에서 비롯한 달러 결제 위기로 보았다. 본문에 밝혔듯 이는 서술이며, 유럽 회복이 미국 원조 없이도 가능했다는 그의 논지와 함께 논쟁적인 평가를 받았다.

1935년 1월 19일 스토크온트렌트에서 우체국 직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에서 역사를 전공해 1956년 최우등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60년 런던정경대학에서 W. N. 메들리콧 지도 아래 제2차 세계대전기 독일 군수산업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든버러대학교와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 스탠퍼드대학교를 거쳐 UMIST 유럽학 교수(1971–1983)와 유럽대학연구소(EUI) 교수(1983–1986), LSE 경제사 교수(1986–1996)를 지냈고, 1993년 내각부 공식 사료편찬관으로 임명되어 공식 사료 첫 권을 썼다. 1987년 영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9월 28일 75세로 사망해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동편에 안장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경제사가의 생애: 전시 경제에서 유럽 통합론까지

전시 경제사: 독일 전쟁경제 연구

앨런 스틸 밀워드는 1935년 1월 19일 스토크온트렌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체국 직원이었고 그는 외아들이었으며, 그곳 문법학교를 다녔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에서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중세·근대사를 공부해 최우등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60년 런던정경대학에서 W. N. 메들리콧의 지도로 제2차 세계대전기 독일 경제의 군수산업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첫 학술 직위는 동양·아프리카연구대학(SOAS)에서 인도 고고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첫 저서 『전시의 독일 경제』(1965)에서 그는 히틀러가 장기전이 아니라 단기 전격전을 준비했다는 논지를 받아들였는데, 이 논지는 이후 리처드 오버리와 애덤 투즈의 도전을 받았다. 1936년 이후 나치의 군비 확충 노력을 그가 축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경제를 총력전을 위해 완전히 동원했다면 나치 체제에 대한 민간의 지지가 무너졌을 것이므로, 체제의 안정은 민간 수요와 군사 수요의 균형에 달려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치는 새로운 유럽 파시즘 체제 안에서 제한적 전격전을 준비했고, 이 전략은 1942년 소련 격파에 실패한 뒤 포기되었다. 1970년 『새 질서와 프랑스 경제』는 정복이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전제를 긍정했다. 노르웨이와 핀란드에서의 휴가가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관심을 낳았고, 그는 노르웨이어·독일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에 능통했다.

마셜 플랜 논쟁과 『서유럽의 재건 1945–1951』

1984년 저서에서 그는 마셜 플랜이 유럽을 붕괴에서 구제한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의 미국 수입품에 대한 높은 수요에서 비롯한 급속한 전후 회복기의 일시적 위기를 완화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의 소비와 식량 수입을 1947년 수준에 동결한다는 반사실적 가정 아래,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마셜 플랜 수혜국이 기계와 원자재 수입을 지불할 수 있었고 회복은 더뎠겠지만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래서 그는 원조가 경제적 필수는 아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결하지 않은 것이 바로 논점임을 인정하고 논의를 정치경제학으로 옮겼으며, 이탈리아 공산당의 강세를 고려하면 긴축은 위험했고 프랑스에서는 마셜 플랜이 실제로 중요했다고 보았다.

그의 박사 제자였던 애덤 투즈는 이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계획은 경제적·정치적 병목을 타개하는 데 중요했고, 프랑스에서 중요했다면 유럽 전체에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밀워드 본인은 마이클 J. 호건을 비판한 글에서 서유럽에서 1947년 여름의 소위 경제 위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유럽의 투자와 생산 붐의 활력이 낳은 달러(외환) 부족이 있었을 뿐이라고 썼다. 투즈는 이 문장을 인용하며 논의를 정리한다. 한국어로 옮기면 번역이며, 그의 논지 요약으로 다루는 편이 정확하다.

유럽 통합론: 민족국가의 구제

1992년 『유럽 민족국가의 구제』에서 그는 유럽 통합이 초국가적 이상이 아니라 파시즘의 도전 이후 민족 민주주의와 민족국가를 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유럽 건설은 대외정책이면서 동시에 국내정책이었고, 광범한 유권자 연합에 물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며, 선거적 성공을 더 이상 보장하지 못하면 되돌려질 수 있었다. 그는 유럽 건설에 대한 통상적 설명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엘리트의 '유럽 사상'도, 대다수 유럽인이 나치 점령에 저항했다는 통합 신화도 설득력이 없다고 보았고, 서유럽의 저항자는 소수였다고 지적했다. 통합은 정부들이 순전히 국가적이거나 국제적인 틀 안에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이루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그는 연방주의적 이상을 내세운 인물들을 '유럽의 성인들'이라 부르며 몬네와 로베르 슈만 같은 인물을 조롱했다. 국가적 계산과 이익이 국제적 이상보다 우선했다는 것이다. 이 입장 때문에 그는 유럽연합의 진화가 연방주의적 목표가 아니라 회원국의 실질적 국가 이익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마셜 플랜과 EEC를 둘러싼 기념행사 자리에서 그를 마주한 학자들과 전직 정책 담당자들은 이러한 최소주의적 평가에 격렬히 반대했지만, 그의 논증은 치밀하고 사료에 기반한 것으로서 새로운 사고를 강제했다.

평가와 말년

그는 앤드루 모라브치크의 『유럽의 선택』을 비롯한 후배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대중 역사나 언론 출연이 아니라 언어 능력과 기록보관소 연구, 정치경제학적 분석으로 명성을 얻었다. 지인과 제자들은 그를 '영감을 주는 역설가'로 기억했고, 찰스 S. 마이어는 그가 마셜 플랜의 신화와 숭배를 걷어내려 했다고 평했다. 마틴 웨스트레이크는 그를 '빛나는 반직관주의자'로, 크리스토퍼 스마우트는 그의 제2차 세계대전사가 인식을 근본적으로 형성했다고 평했다. 1987년 영국학술원 회원, 1994년 노르웨이 왕립과학문학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93년 내각부의 초청으로 정부 공식 사료편찬관이 되어 기록에 대한 보장된 접근과 독립적 판단을 부여받았고, 2002년 『국가 전략의 흥망 1945–1963』을 출간했다. 3년간의 투병 끝에 2010년 9월 28일 75세로 사망해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동편에 안장되었고, 두 번째 권은 완성되지 못했다. 1963년 클로딘 르메트르와 결혼해 1994년 이혼했고, 1998년 역사가 프랜시스 린치와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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