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세레브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Серебровский
소련 러시아 1884–1938 ✕ 처형 · 복권 1956

"소비에트 록펠러"라 불린 바쿠 석유와 소련 금광의 재건자

1924년, 90세의 존 D. 록펠러와 차를 마시고 숲을 산책하며 소련 석유에 대한 신용장을 얻어냈다. "록펠러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뜻밖에도 동의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Главзолото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미국 기술자를 직접 영입해 금 생산을 급증시켰으며, 이 금은 스탈린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오르조니키제의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 건설을 총괄했고, 1937년 대숙청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된 후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금의 전선" — 소련 금광업의 재건

1927년 늦여름, 스탈린은 세레브롭스키를 불러 "완전히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금광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브렛 하트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문학을 인용하며 금광 개발이 변방 지역의 농업·교통·중공업을 연쇄적으로 일으킨 역사적 선례를 상세히 설명했고, 세레브롭스키는 그 박식함에 놀랐다고 훗날 회고했다. 스탈린의 개인적 지시로 1928년 출범한 Главзолото(금·백금·비철금속 총관리국)의 국장에 임명된 세레브롭스키는, 곧바로 알래스카로 건너가 '광산학 교수' 신분으로 미국의 최신 채굴 기술을 조사했다.

알래스카에서 그가 찾아낸 가장 귀중한 자원은 33세의 광산 엔지니어 존 리틀페이지(John Littlepage)였다. "볼셰비키는 엔지니어를 총살하는 버릇이 있다"며 처음에 거절했던 리틀페이지를 세레브롭스키는 2개월간의 끈질긴 설득으로 가족째 소련으로 이주시켰다. 리틀페이지는 이후 9년간 Главзолото 부국장으로 근무하며 알래스카식 탐사·시추 기법을 시베리아 금광에 이식했고, 세레브롭스키는 대공황기 미국에서 수백 명의 기술자를 추가로 영입했다. 1927년 수십 톤 수준이던 소련 금 생산량은 1930년대 중반 연 130톤 규모로 급증했고, 이 금은 제1·2차 5개년계획 기간 스탈린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 되었다.

세레브롭스키는 이 경험을 방대한 저술로 남겼다. 1935년 2권짜리 연구서 『금광업』(미국 편 337쪽, 소련 편 617쪽)을 출간했고, 1936년에는 회고록 『금의 전선에서』를 출간했다. 그러나 이 책은 언급된 인물들이 연달아 '인민의 적'으로 숙청되면서 곧 회수·폐기되었고, 세레브롭스키 자신도 1937년 체포되었다. Главзолото는 그의 사후에도 소련 금광업의 중추로 기능했으며, 1931~1950년 사이 1,116톤 이상의 금을 생산해 소련 외화 수입의 결정적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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