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록펠러"라 불린 바쿠 석유와 소련 금광의 재건자
1924년 크라신의 위임을 받은 아즈네프티 대표로서의 미국 방문에서 장비 구입과 함께 직접 교섭에 나섰다. 90세의 존 D. 록펠러는 한참 생각하더니 뜻밖에도 보증서 발급을 승낙했고, 차를 마신 뒤 숲 공원을 반 시간가량 빠르게 산책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글라브졸로토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존 리틀페이지 같은 미국 기술자를 영입해 금 생산을 늘렸으며, 이 금은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을 총괄했고, 1937년 9월 23일 체포되어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유죄 판결을 거쳐 1938년 2월 10일 처형되었으며 1956년 5월 19일 사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7–1918 산업·생산 운영 · 소련 · 중공업 · 군수공업
경력 연표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 (푸틸로프 공장 대표)
- 1908–1911벨기에 망명; 브뤼셀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 1917–1918무역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9우크라이나 전선 군수보급 책임자; 중앙 포병공장 관리위원회 의장
- 1920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0–1926아즈네프티(아제르바이잔 석유 트러스트) 이사회 의장
- 1926소련 석유신디케이트(네프테신디카트) 이사회 의장
- 1927–1930소련 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 1928–1937글라브졸로토(비철금속·금·백금 총관리국) 국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관련 역사 사건
"금의 전선": 소련 금광업의 재건
1927년 늦여름, 스탈린은 세레브롭스키를 불러 "완전히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금광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브렛 하트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문학을 인용하며 금광 개발이 변방 지역의 농업·교통·중공업을 연쇄적으로 일으킨 역사적 선례를 설명했고, 세레브롭스키는 훗날 그 박식함에 놀랐다고 회고했다.
이때 그가 맡은 기구는 훗날의 글라브졸로토가 아니었다. 1927년 6월 4일 중앙집행위원회·인민위원회 결정으로 세워진 전연방 국영 금 합자회사 소유즈졸로토였고, 최고경제회의와 재무인민위원부, 국영은행이 주주로 참여했으며 세레브롭스키가 그 수장을 맡았다. 이 기구는 1929년 11월 17일 츠베트메트졸로토로 개편되었고, 금·백금·비철금속 총관리국이라는 이름의 글라브졸로토는 1934년에야 중공업인민위원부 산하에서 출범했다.
세레브롭스키는 1927~28년 두 번째 미국 방문길에 알래스카로 향했다. 소련이 당시 미국과 국교가 없어 파리에서 비자를 받았고, 광산학 교수 신분으로 최신 채굴 기술을 조사했다. 알래스카에서 찾아낸 가장 귀중한 자원은 33세의 광산 엔지니어 존 리틀페이지였다. "볼셰비키는 엔지니어를 총살하는 버릇이 있다"며 처음 거절한 그를 세레브롭스키는 두 달(3개월로 전하는 기록도 있다)에 걸쳐 설득해 가족째 소련으로 이주시켰다. 리틀페이지는 9년 남짓(거의 10년으로도 전한다) 부국장으로 근무하며 알래스카식 탐사·시추 기법을 시베리아 금광에 이식했다. 그를 통해 1929년 175명의 미국 광산 기술자가 소련으로 왔고, 1934년 무렵 소련 금 생산량은 미국을 앞질렀다고 전해진다.
생산량 수치는 시기를 구분해야 한다. 서기 139톤을 기록한 1938년의 소련 금 생산은 글라브졸로토 77.1톤과 달스트로이 61.9톤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혁명 전 62톤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세레브롭스키는 1935년 2권짜리 연구서 『금광업』(미국 편 337쪽, 소련 편 617쪽)과 1936년 회고록 『금의 전선에서』를 남겼으나, 회고록은 언급된 인물들이 연달아 '인민의 적'으로 몰리면서 출간 직후 회수되었다. 그 자신도 1937년 9월 23일 체포되었고, 10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후보위원직에서 해임된 뒤 1938년 2월 10일 처형되었다. 금 생산이 수입 기계 대금을 대는 핵심 외화 원천이었다는 점은 이 사업의 성격을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