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농민사회주의의 창시자, 《종》의 발행인
「우리는 해방하는 자와 함께, 그가 해방하는 한 함께 간다」 — 1858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을 환영하며 《종》에 게재한 논설에서.
러시아의 작가·철학자이자 '러시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농민 공동체(오브시나)에 기초해 자본주의를 우회하는 사회주의 이행론을 정립했다. 런던 망명 중 발행한 《종》(콜로콜)은 개혁기 여론을 움직였다.
경력 연표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수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835–1842반정부 모임 혐의로 체포, 페름·뱟카·블라디미르·노브고로드 유형
- 1842–1847모스크바에서 서구파 지식인으로 활동, 소설 《누구의 죄인가》 발표
- 1847러시아를 영구히 떠나 유럽 망명
- 1852런던 정착, 자유 러시아 인쇄소 설립
- 1855–1868연감 《북극성》 발행, 푸시킨·레르몬토프의 금지시와 자유주의 논설 수록
- 1857–1867주간지 《종》(콜로콜) 발행, 러시아 개혁 여론 주도
- 1864–1870제네바에서 망명 출판 지속, 만년의 《과거와 사색》 집필 완성
「저편으로부터」: 1848년과 서구에 대한 결별
게르첸이 유럽에 도착한 1847년, 그는 급진적 공화주의자였으나 아직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그에게 모든 희망의 실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해 6월 파리 노동자 봉기와 그 유혈 진압(1만 5천 명이 체포되고 4천 명이 알제리로 유형되었다)은 게르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서구 부르주아 질서의 폭력적 본질을 목도한 그는 결정적으로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이 전환은 첫 철학적 대작 《저편으로부터》(Vom anderen Ufer, 1850; 러시아어판 С того берега, 1855)로 응축되었다. 독일어로 먼저 출간된 이 에세이집에서 게르첸은 과거의 자유주의 신념과 철저히 결별하고, 서구 문명은 이미 '죽어가고 있으며' 그 낡은 형식 속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반혁명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시기에 쓰인 이 책은, 러시아와 슬라브 세계가 농민 공동체에 기초해 역사의 다음 단계를 열 것이라는(훗날 '러시아 사회주의'로 불리게 될) 관점의 출발점이 되었다.
《과거와 사색》: 러시아 산문의 정점
《과거와 사색》(Былое и думы, 1852–1868)은 게르첸 문학의 정점이자 19세기 러시아 산문의 가장 독창적인 성취 중 하나로 평가된다. 니콜라이 오가료프에게 헌정된 이 방대한 자서전적 연대기는 유년기부터 유럽 망명 말년까지, 개인의 내면과 한 시대의 파노라마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게르첸은 1852년 아내 나탈리의 죽음이라는 참화 속에서 집필을 시작했고, 거의 죽을 때까지 고쳐 쓰고 덧붙였다. 총 아홉 부분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모스크바 대학 시절과 유형, 서구파-슬라브파 논쟁, 1848년 혁명의 목격, 런던 망명 생활, 바쿠닌을 비롯한 망명자들의 초상, 벨린스키·차다예프 등과 주고받은 서한집까지 아우른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인 '마음의 소용돌이'(Кружение сердца)는 게르첸의 아내 나탈리와 독일 시인 게오르크 헤르베크 사이의 불륜과 그로 인한 가정의 붕괴를 다룬 장으로, 작가 사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D.S. 미르스키는 게르첸을 '위대한 초상화가-인상파 화가'라 불렀고, 그의 인물 묘사는 '잊을 수 없이 생생하다'고 평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 작품이 '그 규모와 완성도에서 19세기 러시아 위대한 소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한다. 헤르젠 자신에게 이 책은 혁명적 신념과 개인적 비극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평생의 과업이었다.
폴란드 봉기와 《종》의 위기, 1863년
1863년 1월 폴란드에서 러시아 제국에 대항한 무장 봉기가 일어났을 때, 게르첸은 망명지에서 단호히 폴란드 독립을 지지했다. 《종》 지면을 통해 그는 러시아 장교들에게 진압을 거부할 것을 호소했고, 폴란드를 '자유를 위해 피 흘리는 순교자'로 묘사했다. 이 입장은 러시아 내 여론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개혁기 내내 《종》을 열독하던 관료·장교·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대거 이탈했고, 발행 부수는 약 2,500부에서 500부 이하로 급감했다. 알렉산드르 2세조차 더 이상 게르첸의 출판물에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1867년 《종》은 결국 폐간되었고, 게르첸은 러시아 혁명 운동 내에서도 고립되어 갔다. 한때 개혁 여론의 정점에 섰던 그는, 망명 말년에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너무 혁명적이고, 급진파에게는 너무 온건한' 경계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