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도 군 정치기관을 수호하려 했던 마지막 총정치국장
그는 말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 — 군 정치기관 해체를 거부하며 사임을 택하면서.
소련군 정치기관에서 평생을 복무한 정치장교로,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어 군대 내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다. 초기에는 정치기관 쇄신을 추진했으나, 개혁이 반군 선전과 정치장교 제도 자체의 해체로 치닫자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임을 선택한 그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군 내 당 통제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마지막 총정치국장이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57–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49체레포베츠 보병학교 졸업, 콤소몰 정치업무 시작
- 1957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통신)
- 1960–1965총정치국장 보좌관 (콤소몰 담당, 대령)
- 1965–1971제13근위군단 정치부장 → 모스크바 군관구 정치국 제1부국장 (소장)
- 1971–1980주독소련군 정치국 제1부국장 → 자바이칼 군관구 정치국장 (중장)
- 1980–1985총정치국 부국장 (상장) → 주독소련군 정치국장
- 1985–1990소련군·해군 총정치국장 (대장, 1986)
- 1990–1992국방성 총감찰단, 퇴역
관련 역사 사건
총정치국장 시절: 페레스트로이카와 정치기관 수호
리지체프는 1985년 7월 57세의 나이로 23년간 총정치국을 이끈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 자리는 국방장관 다음가는 군내 두 번째 서열이었고, 총정치국장은 국방장관이 아니라 당 중앙위원회 결정에 따라 임면되는 특수한 지위였다. 그는 취임 직후 정치기관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에 맞춘 '쇄신' 방침을 제시했고, 1986년 대장으로 승진하여 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그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군내 적용을 주제로 한 저서 『변화의 길, 행동의 시간』(1989)을 출간하며 개혁의 이론적 기반을 스스로 정리했다.
그러나 개혁이 심화되면서 언론과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 군대와 정치장교 제도 자체를 겨냥한 비판이 거세지자, 리지체프는 쇄신과 수호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는 반군(反軍) 선전을 막고 정치기관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킬 것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당 중앙위원회와 고르바초프 개인에게 제출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다. 후임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당시 백만 명에 달하는 군내 공산주의자 대오의 지도자로서 고르바초프를 수차례 독대하려 했으나 끝내 면담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1989년 12월 열린 제1차 전군 장교대회는 군사 개혁의 한 분수령이었는데, 대의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큰 틀은 지지하면서도 언론의 '부당한' 군대 비판에는 강하게 반발했고, 최고사령관 고르바초프가 이 대회를 외면한 것에 불만을 표했다.
정치기관 해체 압력이 무르익자 리지체프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내 원칙은 체르보네츠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 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자신을 포함해 정치기관 지도부는 정치장교 제도의 해체를 요구하는 기류 속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고, 1990년 7월 총정치국장직을 내려놓았다.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는 훗날 그를 두고 '소련 붕괴 직전까지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의지의 인물'로 회고하며, 그가 여느 군 수뇌부보다 국내 정세에 밝았고 병력의 정치·도덕 상태를 강화할 실질적 방안을 제안했지만 당 상층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정치기관 수호에 실패한 그는 이후 국방성 총감찰단과 예비역 장교 단체 '메가피르'에서 활동하다가 병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시집 두 권을 내고 말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