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마트베예비치 루먄체프

Алексей Матвеевич Румянцев
소련 러시아 1905–1993 ○ 자연사

흐루쇼프의 경제 토론을 연 정치경제학자, 소련 사회학의 제도적 창립자

「모든 사회구성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사회주의 구성체만은 조직화된 대중행동으로 생겨났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연구소 간부 회의에서 (V.A. 야도프 회고)

흐루쇼프 해빙기의 경제학자. 1962년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실어 경제개혁 논쟁을 촉발했고, 소련 최초 사회학 연구소를 창립했다. 코무니스트·프라우다 주필을 지냈으나 자유주의 성향으로 해임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소련 사회학의 제도적 창립 — ИКСИ

루먄체프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은 소련 최초의 사회학 연구소인 ИКСИ(Институт конкретных социальных исследований)의 창립이다. 1950년대 말 소비에트 사회학 협회가 생겼지만 제도적 기반은 취약했고, 사회학은 철학 연구소의 한 분과로 머물러 있었다. 루먄체프는 1967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에 오른 후 사회학 독립의 필요성을 꾸준히 로비했고, 1968년 5월 22일 정치국 결정으로 ИКСИ가 공식 출범했다. 초대 소장으로서 그는 유리 레바다, 이고리 콘, 블라디미르 야도프, 보리스 그루신 등 당대 최고의 사회학자들을 한데 모아 '과학적 사회주의 안의 자유로운 섬'을 만들었다. 연구소는 타간로크 프로젝트(전형적 소련 중간도시의 전방위 조사, 1967~1973), 『인간과 그의 노동』(1967, 즈드라보미슬로프·야도프), 콘의 『개인의 사회학』(1967) 등 현대적 사회학의 기념비적 작업을 쏟아냈다. 루먄체프는 연구소 간부들을 소집해 '모든 사회구성체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사회주의만은 조직화된 대중행동으로 생겨났다. 여기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비롯된 것은 아닐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 이후 보수 반동이 거세지자, 1970년 레바다 강의 사건을 계기로 당의 압박이 본격화되었다. 루먄체프는 중앙위에 서한을 보내 '과학 독점과 행정명령적 수법'을 비판했지만, 오히려 '반소 활동을 덮어주고 있다'는 역공을 받았다. 1971년 그가 사임한 후 연구소는 ИСИ(사회학연구소)로 재편되었고 레바다, 콘, 갈킨 등 핵심 인물들이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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