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전쟁을 제도화한 미국 정보 관료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다른 이름: 앨런 웰시 덜레스 · 알렌 덜레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6–1926미 국무부 외교관, 유럽·근동 담당
- 1927–1944외교·군축 협상 법률고문, 외교협회 간사·회장
- 1942–1945OSS 베른 지국장, 작전 선라이즈 협상 담당
- 1945OSS 베를린 지국장
- 1951–1953CIA 계획 담당 부국장, 중앙정보국 부국장
- 1953–1961중앙정보국장
- 1963–1964케네디 암살 진상조사 워런위원회 위원
관련 역사 사건
워런위원회 참여와 정보기관 책임 문제 (1963~1964)
케네디 암살이 일어난 1963년 11월 22일 이후, 린든 존슨 대통령은 덜레스를 케네디 암살 조사를 위한 7인 워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위원회 자체는 1963년 11월 29일 행정명령 11130호로 설치되었고, 덜레스는 피그스만 침공 참패 뒤 케네디에게 밀려난 전 중앙정보국장 신분으로 합류했다. 존슨은 공화·민주 양당과 상하원에서 위원을 골랐고, 대법원장 얼 워런과 세계은행 총재를 지낸 외교관 존 J. 매클로이 등이 함께했다.
위원회의 888쪽 최종 보고서는 1964년 9월 24일 존슨에게 제출되어 사흘 뒤 공개되었고, 케네디를 사살한 총탄은 리 하비 오스월드가 발사했으며 오스월드는 단독으로 행동했다고, 또 오스월드를 죽인 잭 루비도 단독 범행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결론은 이후 연구들로부터 도전과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논쟁적으로 남았다. 위원회 내부에서도 셔먼 쿠퍼·보그스·러셀 세 위원이 하나의 총탄이 케네디와 존 코널리 주지사를 모두 상처 입혔다는 이른바 단일 총탄 가설에 반대했다. 쿠퍼는 결론이 "성급하고 결정적이지 못하다"고 보았고, 러셀은 "여러 의심스러운 정황" 때문에 암살을 둘러싼 공모가 없었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며, 오스월드가 다른 사람의 인지나 조장, 도움 없이 단독으로 계획하고 저질렀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을 작성했다. 러셀의 동의 아래 그 문장은 최종 보고서에 실리지 않았고, 그가 요구한 "러셀 상원의원 반대" 각주도 만장일치를 고집한 워런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임명은 곧바로 이해충돌 문제를 제기했다. 덜레스를 해임한 케네디의 죽음을 조사하는 위원회에 그가 들어간 것은 공정성을 의심하게 했고, 역사가와 논평자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논쟁거리로 남았다. 언론인 스티븐 킨저의 견해에 따르면 존슨이 덜레스를 기용한 주된 이유는 중앙정보국 증인들을 어떻게 심문하고 어떤 질문을 던질지 위원회에 조언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존슨과 덜레스 모두 케네디가 카스트로 등 외국 지도자 암살을 꾀한 행정부의 비밀 계획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로버트 케네디 역시 쿠바 개입 은폐를 우려해 덜레스의 기용을 존슨에게 권했다.
논쟁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79년 하원 암살특별위원회는 중앙정보국이 기관 차원에서 암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결론지었으나, 기관 내부의 인지 범위와 위원회의 조사 범위·결론에 덜레스가 행사한 영향력을 둘러싼 논란은 남았다. 정보기관 수장 출신이 자신이 속했던 기관을 조사하는 위원회에 앉은 구조라는 점에서, 이 대목은 냉전기 미국 정보체계의 책임 소재 문제를 압축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