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마르티

André Marty
프랑스 프랑스 1886–1956 ○ 폐암

흑해 함대 반란을 이끈 해군 기관사, 코민테른 서기국에 오르다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알바세테의 도살자 — 스페인 내전과 국제여단

1936년 9월 코민테른이 국제여단 창설을 결정하자, 마르티는 여단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알바세테에 본부를 설치했다. 루이지 롱고, 주세페 디 비토리오와 함께 3인 지도부를 구성한 마르티는 35,000명의 53개국 지원병 모집·훈련·배치를 총괄했으며, 프랑스-벨기에 대대는 '앙드레 마르티 대대'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마르티는 극단적 규율과 편집증적 의심으로 악명을 떨쳤다. 사소한 위반에도 즉결처형을 명령하고, 트로츠키스트·아나키스트·POUM 계열 의용병을 색출해 숙청했으며, 프랑스 아나키스트지 《르 리베르테르》가 붙인 '알바세테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정착되었다. 마르티는 훗날 약 500명의 여단원을 처형했다고 시인했으나 이 수치는 논쟁의 대상이다. 1937년 11월 팔미로 톨리아티는 마르티의 작업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군사 문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코민테른에 권고했다.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마르티를 광적 숙청자로 묘사했으며, 마르티가 스탈린에게 보낸 밀고는 소련 특파원 미하일 콜초프의 체포·처형의 단서가 되었다. 알바세테에서의 그의 활동은 국제적 연대와 스탈린주의적 통제 사이에서 분열된 국제여단의 이중적 성격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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