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 일리치 하차투랸

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1903–1978 ○ 자연사

아르메니아 선율을 소비에트 교향악에 녹여낸 작곡가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1948년 음악계 숙청과 복권

하차투랸은 1940년대 모스크바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43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1947년 10월혁명 30주년을 기념해 교향시를 작곡했으며, 이 작품은 뒤에 제3교향곡으로 불렸다. 1948년 1월 크렘린에서 열린 음악가 회의에서 중앙당 지도부는 하차투랸과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을 형식주의자로 규정하고 그들의 음악을 인민에게 적대적이라고 비난했다. 비판의 표적이 된 「교향시」는 소비에트 인민의 기쁨과 자부심을 표현하려는 작품이었지만, 당은 이를 공식적으로 문제 삼았다.

하차투랸은 1948년 3월 자신의 예술적 오류를 인정하는 공개 사과를 했다. 그는 1950년대 회고 발언에서 당시 사과가 진심이 아니었으며 직업을 바꿀 생각까지 했다고 밝혔다. 비난은 그의 음악 양식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고, 그해 말 영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음악으로 찬사를 받으며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1948년의 조치는 창작을 당의 문화 기준에 맞추도록 압박했으며, 하차투랸은 이후 작곡뿐 아니라 교육과 작곡가동맹의 행정 직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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