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를 변호한 역사가이자 권력의 내부 기록자
피그만 침공 뒤 그는 결정적 회의에서 더 크게 경고하지 못한 자신을 두고 "나는 몹시 자책했다"고 회고했다.
아서 M. 슐레진저 주니어는 미국 자유주의와 대통령 권력의 역사를 탐구한 역사가이자 공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특별보좌관으로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연설문을 다루며 피그만 침공에 반대했지만, 결정적 회의에서 침묵한 책임도 훗날 인정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이 아니었으나 유엔 주재 대사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위기 발표 작성을 도왔다. 1965년의 『A Thousand Days』는 케네디의 위기 관리를 정교한 지도력의 서사로 각인시켰고, 이후 연구자들은 그 영웅적 기억이 배제한 쿠바와 소련의 행위, 비밀 합의, 구조적 위험을 다시 조명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8하버드대학교 학사, 최우등 졸업
- 1939–1942하버드대학교 펠로
- 1943–1945전략정보국 분석관
- 1946–1962하버드대학교 역사학 교수
- 1961–1964케네디 대통령 특별보좌관
- 1966–1994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인문학 교수
- 1965『A Thousand Days』 출간, 1966년 퓰리처상 수상
관련 역사 사건
냉전 자유주의의 형성과 『생명의 중도』
슐레진저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자유주의의 반공적 재편에 앞장섰다. 1947년 1월, 그는 전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휴버트 험프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 등과 함께 민주주의행동을위한미국인연합(ADA)을 창립했다. ADA의 창립자들은 주류 정치 안에 진보적이고 실용적인 비공산주의적 '생명의 중도'를 굳히기를 바랐는데, 이는 슐레진저가 1949년 저서에서 정식화한 개념이었다. 그는 1953~1954년 ADA 전국 의장을 지냈고, 1954~1955년에는 제임스 E. 도일과 공동의장을 맡았다.
같은 시기 저서 『생명의 중도: 자유의 정치』(1949)에서 슐레진저는 규제되지 않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쪽을 비판하면서 뉴딜식의 강력한 개입주의적 자유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레닌 이후의 공산주의를 전체주의적 군사 독재로 규정하고, 헨리 A. 월리스처럼 공산주의와의 공존을 주장한 자유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ADA는 1948년 대선에서 월리스의 진보당을 공격하며 그를 공산당의 앞잡이로 묘사했는데, 이 노선은 전후 미국 자유주의가 반공주의를 정체성의 핵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저서는 반공주의와 학문의 자유를 함께 내세웠다. 슐레진저는 교사가 이사회나 정치 당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책임 있는 이해에 따라 가르칠 자유가 핵심 쟁점이라고 썼고, '방해받지 않는 탐구'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생명의 중도' 노선은 훗날 평가가 갈렸다. 이 책은 냉전 자유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동시에 그 반공적 강조가 미국의 개입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반대로 그를 '제국주의적 역사가'로 규정하는 평가에 대해서는, 그가 오히려 반제국주의적 역사가였다는 반론도 학계에서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