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치 벨러

Kovács Béla

소련군에 끌려가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된 사무총장

체포되며 남긴 말: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 죄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평생의 일을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농 출신의 농민 정치가로, 소학교 네 학년만 마친 뒤 1933년 소농당에 입당해 1945년 사무총장으로 전후 최대 정당을 이끌었다. 틸디·너지 정부의 농업장관으로 지주제 해체와 토지개혁을 밀었고,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에 맞서 당의 독립을 지켰다. 1947년 2월 국회가 면책특권 박탈을 거부하자 소련군이 조작된 간첩 혐의로 그를 체포해 굴라크로 끌고 갔고, 이 납치는 너지 페렌츠 총리의 사임과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되었다. 1955년 귀환해 1956년 너지 임레 혁명정부의 농업장관으로 복귀했고, 진압 뒤 카다르 체제에 협력하다 1959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농촌에서 당 지도부로: 1927–1945

코바치 벨러는 1926년 결혼해 아내가 물려받은 8홀드의 땅에서 농사를 시작했고, 스스로 땅을 늘려 1940년까지 약 30홀드에 이르렀다. 소학교 네 학년과 폴가리 네 학년을 마치고 농업 전문 과정을 들었으며 접객 기술도 익혀 농사일을 떠날 길을 열어 두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농민으로 남지 않았다. 1927년 열아홉 살에 파타치의 대표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32년부터 메체칼러에서 부판사(부읍장)를 맡았다. 역사가 비다 이슈트반은 그를 “승진하고 시민화하려 하며 세상일에 관심을 둔 농민 인간형”, 즉 바라녀 지방에서 흔했던 이른바 ‘폴가르퍼러스트’의 전형으로 묘사했다. 그는 장화가 아니라 대개 구두와 긴 바지를 입고 다녔다.

1930년대 초 그는 전국 정치 문제에 눈을 돌려 1933년 독립소농당에 입당했다. 야심 있고 유능한 젊은 농민으로서 급속히 당내 서열을 올라, 1936년 바라녀 주의 제1인자가 되었고, 서른한 살이던 1939년 전국 부사무총장 겸 국회의원 후보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머저르 페러스트서베테셰크(헝가리 농민연합)의 사무총장을 맡아 농민 대중 조직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나치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44년 11월 29일 이후 페치 시 운영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이후 내무부 정치담당 차관이 되었다. 이렇게 소농 출신의 지방 활동가가 전국 당 지도부와 전후 국가 행정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1945년 이전에 이미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