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미하일로비치 게센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Гессен
소련 러시아 1893–1936 ✕ 처형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를 밝힌 마르크스주의 과학사학자,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

1931년 런던, 게센은 연단에서 포프의 시를 인용했다. '신이 말하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빛이 되었다.' 이어 그는 《프린키피아》가 신의 계시가 아니라 17세기 상업·산업·전쟁의 기술적 요구가 낳은 산물이라고 선언했고, 강당은 술렁였다.

소비에트 물리학자·과학사학자. 1931년 런던에서 뉴턴 역학이 17세기 기술·경제적 요구의 산물임을 논증, 과학사회학 외재주의 전통을 열었다.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옹호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현대 물리학의 철학적 옹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위한 투쟁

게센은 과학사학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활동의 절반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소비에트 철학 체계 내에서 옹호하는 데 바쳐졌다. 1928년 출간한 『상대성이론의 기본 이념』은 아인슈타인 이론의 친절한 개설서이자 동시에 '부르주아적 이상주의'라는 공격으로부터 이론을 지키려는 변론이었다. 이어 아르투어 하스의 『물질파와 양자역학』 러시아어판(1930)에 쓴 긴 서문에서 그는 양자역학의 확률적 서술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과성 개념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론적 결정론을 극복한 더 높은 차원의 인과성이라고 논증했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철학적 논문이 아니라 실존적 투쟁이었다. 모스크바대학의 물리학자 아르카디 티미랴제프와 철학자 알렉산드르 막시모프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반동 과학'이라고 공격하며 뉴턴적 세계관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게센은 절친한 친구 이고리 탐을 비롯한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자들을 대표하여 이 공격에 맞섰고, 새 물리학이 변증법적 유물론과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상호 풍요롭게 한다고 설득하려 애썼다. 1931년에는 그가 대소비에트백과사전에 쓴 '에테르' 항목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란다우, 가모프, 브론시테인, 이바넨코 등 젊은 레닌그라드 이론가들이 '에테르'와 '플로지스톤'이라고 적힌 병 그림을 곁들인 조롱 편지를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들은 게센을 구시대의 인물로 취급했지만, 정작 게센은 이들보다 더 일관되게 소비에트에서 새 물리학을 수호한 인물이었다. 이 철학적 전선은 1930년대 중반 치명적인 정치적 함의를 띠게 되었고, 결국 게센 자신도 그 위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 1931년 런던 논문과 과학사학의 전환

1931년 6월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열린 제2차 국제과학사학회에서, 부하린이 이끄는 소비에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게센은 「뉴턴 《프린키피아》의 사회경제적 뿌리」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과학사학의 방향을 바꾼 사건으로 평가된다.

게센의 논지는 명료했다. 뉴턴의 역학은 순수한 천재의 고립된 산물이 아니라 17세기 영국 상업자본주의의 기술적 요구, 즉 원양 항해를 위한 천체력, 광산 배수를 위한 펌프, 포병을 위한 탄도학, 수로 건설을 위한 유체역학에 대한 응답이었다. 《프린키피아》의 물리적 주제들을 하나하나 당대 기술적 과제들과 연결하며, 그는 과학의 내용 자체가 물질적 생산 조건에 뿌리박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과학사를 위대한 개인의 계보로 보던 휴얼 이래의 전통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 강연은 젊은 조지프 니덤, J.D. 버낼, 로버트 K. 머턴 등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과학사회학의 '외재주의' 전통의 출발점이 되었다. 게센은 이 논문에 또 하나의 전략을 숨기고 있었다: 뉴턴 물리학이 부르주아적 조건에서 탄생했으면서도 과학적 타당성을 갖는다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역시 '부르주아 과학'이라는 낙인만으로 배척할 수 없다는 우회적 논증이었다. 사후 80년이 넘도록 이 논문은 과학사 방법론 논쟁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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