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자주관리의 경제 이론을 설계한 유고슬라비아의 혁명가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6– 경제·재정·계획 · 유고슬라비아
경력 연표
- 1941–1945슬로베니아 해방전선 정치서기 겸 파르티잔 총사령부 정치위원
- 1945–1946슬로베니아 인민공화국 초대 정부 주석
- 1946–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경제평의회 의장 겸 산업장관
- 1947–1952제1차 5개년 계획 입안·집행 총괄
- 1948–195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 위원
관련 역사 사건
스탈린식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 1948~1951년의 전환
키드리치는 1946년부터 죽을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경제를 총괄했고, 중공업과 대형 공장·발전 시설, 민간 기업 국유화, 농업 집단화를 우선한 1947~1952년 제1차 5개년 계획의 주요 설계자였다. 이 시기 그의 경제 정책은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전통적 경제 구조와는 이질적인 스탈린주의 원칙에 따랐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주민들은 식량·의류 같은 기본 생필품을 서방 원조에 의존해야 했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은 그 모델에 대한 재검토를 강제했다. 같은 해 키드리치는 유고슬라비아 정치국에 들어갔고, 에드바르드 카르델리, 블라디미르 바카리치, 밀로반 질라스, 모샤 피야데와 함께 노동자 자주관리의 법적 토대가 된 1950년 「국영 경제기업 관리에 관한 기본법」을 마련한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이 개혁은 당시 지배적이던 스탈린식 사회주의와의 의도적 대조 속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생산 운영에 보다 직접적으로 참여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연설에서 노동 대중이 "정당이라는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 매일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스크바와의 결별은 경험에서도 나왔다. 전시 모스크바 협상 뒤 그는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를 대등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소련 세력권의 일부로 취급한다는 점을 관찰했고, 1950년 가을에는 소련에 속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계속 경제 정책을 책임졌고 1952년 대회에서 다시 좁은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가 함께 설계한 자주관리 전환이 아직 공고화되던 시점인 1953년 백혈병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