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너머에 우리 땅은 없다」
1942년 9월 12일, 전임자가 도시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본 자리. "임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물음에 추이코프는 답했다. "맹세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죽거나, 지켜내겠습니다."
스탈린그라드 폐허의 제62군 사령관. 독일군과 수류탄 투척 거리에 지휘소를 두는 「포옹 전술」로 도시를 버텼고, 자신의 군대가 계획의 미끼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부대는 근위 제8군이 되어 베를린까지 걸어갔다. 유언대로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예프 언덕, 자기 병사들 곁에 묻혔다.
경력 연표
- 1942.9제62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 1943–45근위 제8군, 베를린까지
- 1945.5.1베를린에서 독일군의 첫 항복 교섭을 접수
- 1949–53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 1955/1960–64원수 승진, 지상군 총사령관
관련 역사 사건
1942년 9월 12일, 볼가 서안의 지휘소
툴라 지방 세레브랴니예 프루디의 농민 가정에서 여덟째로 태어난 바실리 추이코프는 열두 살에 고향을 떠나 페트로그라드에서 견습공으로 일했고, 열여덟 살에 붉은 군대 연대장이 되어 내전을 치렀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마치고 중국 군사고문으로도 근무한 그는 1942년 9월, 독일 6군이 시가지에 진입한 스탈린그라드의 62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전임자가 도시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 자리였다. 임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도시를 사수하거나 그곳에서 죽겠다고 답했다.
추이코프의 62군은 볼가 강 서안의 좁아지는 교두보에서 독일군의 화력 우위를 무력화하는 싸움법을 만들어 냈다. 전선을 적과 「포옹」할 만큼 밀착시켜 독일 공군과 포병이 아군 오폭 없이는 때릴 수 없게 했고, 소총과 수류탄, 공병 폭약으로 무장한 소규모 돌격조가 건물 하나, 층 하나를 놓고 싸웠다. 저격수 자이체프의 말에서 나온 「볼가 너머에 우리 땅은 없다」는 62군 전체의 맹세가 됐다.
그의 지휘소는 강안 벙커에 있었고 여러 차례 매몰과 화재를 겪었지만 강 동안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62군은 두 달 넘게 도시의 마지막 몇 백 미터를 지켜 냈고, 그 사이 소련군은 도시 밖에서 우라누스 작전의 포위망을 준비했다.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은 추이코프라는 지휘관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1945년 5월 1일, 베를린에서 받은 항복
스탈린그라드의 62군은 1943년 4월 근위 칭호를 받아 8근위군이 됐고, 추이코프는 이 군을 이끌고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를 거쳐 베를린까지 서진했다. 1945년 4월, 젤로 고지의 혈전을 뚫은 8근위군은 베를린 시가로 진입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단련된 시가전 돌격조 전술이 이번에는 공격하는 쪽의 무기가 됐다.
1945년 5월 1일 새벽, 독일 육군참모총장 크렙스 장군이 백기를 들고 추이코프의 지휘소를 찾아와 히틀러의 자살을 알리고 정전 교섭을 시도했다. 추이코프는 무조건 항복 외에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소련군의 입장을 통보했고, 5월 2일 베를린 방위사령관 바이틀링이 수비대 전체의 항복을 그에게 문서로 제출했다. 스탈린그라드의 지휘관이 베를린의 항복을 받은 것이다.
전후 추이코프는 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국방차관을 지냈고 1955년 소련원수가 됐다. 1982년 사망한 그는 유언에 따라 모스크바의 국립묘지가 아니라 볼고그라드 마마예프 쿠르간, 62군 병사들이 묻힌 언덕에 안장됐다. 소련원수 가운데 유일하게 크렘린 벽 밖에, 자신의 병사들 곁에 묻힌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