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의 '소(小) 10월'을 이끈 혁명가
1925년 12월, 키질오르다 당대회에서 "내가 오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소비에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소(小) 10월'의 포문을 열었다.
1903년 입당한 구(舊) 볼셰비키로, 1912년 프라하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러시아국에 선출되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봉기에 참가했고,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랄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으며 차르 가족 처형의 주요 조직자였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소(小) 10월' 기치 아래 급진적 집단화와 유목민 정착화를 추진했고, 이후 소련 국가중재관(1933–1939)을 지냈다. 1939년 체포되어 1941년 총살, 1961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 1903RSDR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6–09페테르부르크 위원회·모스크바 위원회
- 1912중앙위원 겸 러시아국 선출 (프라하 당대회)
- 1917–18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우랄 소비에트 권력 수립
- 1922–25사마라 주 집행위원장, 기근 복구 지도
- 1925–33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소(小) 10월' 집단화
- 1933–39소련 국가중재관
- 1939–41체포, 수감, 총살
관련 역사 사건
- 1917.10–1918.0110월 혁명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우랄 소비에트 지도자 · 차르 일가 처형 조직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랄 소비에트 권력을 주도했고 차르 가족 처형의 주요 조직자였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카자흐스탄 '소(小) 10월'의 집행자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소 10월' 기치 아래 바이(бай) 재산 몰수, 유목민 강제 정착화, 급진적 집단화를 추진했다. 그의 정책은 1932~1933년 카자흐 기근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1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했다.
- 1937–1938대숙청후속 처형의 표적카자흐스탄 전 당서기로 1939년 체포되어 독소전 발발 뒤인 1941년 총살되었다.
차르 가족 처형의 조직자
골로쇼킨은 1918년 여름, 우랄 지역 군사담당 인민위원으로서 로마노프 가문 처형의 핵심 조직자였다. 6월 29일 우랄 소비에트는 전(全) 로마노프 가문을 처형하기로 의결했고, 골로쇼킨은 그 결정을 모스크바에 직접 전달하기 위해 7월 3일 수도로 향했다. 당시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에는 단 7명만이 남아 있었으며, 레닌, 스베르들로프, 제르진스키 세 명과의 회합에서 차르 처형이 승인되었다. 구체적 실행의 재량은 우랄 소비에트에 위임되었다.
7월 16일 저녁, 백군 전선이 예카테린부르크에 접근하자 골로쇼킨과 게오르기 사파로프는 모스크바로 최종 승인 암호전문을 발송했으나 직통선이 끊겨 페트로그라드의 지노비예프를 경유해야 했다. 유롭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스베르들로프가 서명한 처형 명령이 오후 7시경 골로쇼킨을 통해 전달되었다.
골로쇼킨은 직접 이파티예프 저택으로 가서 페트르 예르마코프, 스테판 바가노프와 함께 우랄 소비에트 대표로서 처형 현장을 지휘했으나, 총격 자체에는 가담하지 않고 담장 밖에서 총성이 외부에 들리는지 확인하며 서성였다. 시신이 트럭에 실리자 그는 니콜라이 2세의 시신을 굽어보며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의 끝인가…"라고 중얼거렸고, 함께 있던 미하일 쿠드린은 "아직 아닙니다. 할 일이 더 남았습니다"라고 답했다. 7월 18일 예카테린부르크 전신국에서는 영국 영사 토머스 프레스턴이 런던에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어젯밤 총살되었다"고 타전하려 하자, 골로쇼킨이 전문을 빼앗아 붉은 연필로 "교수형 집행인 차르 니콜라스가 어젯밤 총살되었다 — 그가 충분히 받을 만한 운명이었다"라고 고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