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이사예비치 골로쇼킨

Филипп Исаевич Голощёк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6–1941 ✕ 처형

카자흐스탄의 '소(小) 10월'을 이끈 혁명가

1925년 12월 키질오르다 당대회에서 "내가 오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소비에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소(小) 10월' 강령의 포문을 열었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1912년 프라하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러시아국에 선출되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봉기에 참가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랄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지도했으며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저택에서의 차르 가족 처형을 조직한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로 사실상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소(小) 10월' 기치 아래 급진적 집단화와 유목민 강제 정착화를 추진했고, 이는 1930~1933년 카자흐 대기근과 함께 기록된다. 1933년 해임되어 소련 국가중재관(1933–1939)을 지내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총살되었으며 1961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차르 가족 처형의 조직자

골로쇼킨은 1918년 여름, 우랄 지역 군사담당 인민위원으로서 로마노프 가문 처형의 핵심 조직자였다. 6월 29일 우랄 소비에트는 전(全) 로마노프 가문을 처형하기로 의결했고, 골로쇼킨은 그 결정을 모스크바에 직접 전달하기 위해 7월 3일 수도로 향했다. 당시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에는 단 7명만이 남아 있었으며, 레닌, 스베르들로프, 제르진스키 세 명과의 회합에서 차르 처형이 승인되었다. 구체적 실행의 재량은 우랄 소비에트에 위임되었다.

7월 16일 저녁, 백군 전선이 예카테린부르크에 접근하자 골로쇼킨과 게오르기 사파로프는 모스크바로 최종 승인 암호전문을 발송했으나 직통선이 끊겨 페트로그라드의 지노비예프를 경유해야 했다. 유롭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스베르들로프가 서명한 처형 명령이 오후 7시경 골로쇼킨을 통해 전달되었다.

골로쇼킨은 직접 이파티예프 저택으로 가서 페트르 예르마코프, 스테판 바가노프와 함께 우랄 소비에트 대표로서 처형 현장을 지휘했으나, 총격 자체에는 가담하지 않고 담장 밖에서 총성이 외부에 들리는지 확인하며 서성였다. 시신이 트럭에 실리자 그는 니콜라이 2세의 시신을 굽어보며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의 끝인가…"라고 중얼거렸고, 함께 있던 미하일 쿠드린은 "아직 아닙니다. 할 일이 더 남았습니다"라고 답했다. 7월 18일 예카테린부르크 전신국에서는 영국 영사 토머스 프레스턴이 런던에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어젯밤 총살되었다"고 타전하려 하자, 골로쇼킨이 전문을 빼앗아 붉은 연필로 "교수형 집행인 차르 니콜라스가 어젯밤 총살되었다 — 그가 충분히 받을 만한 운명이었다"라고 고쳐 썼다.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소(小) 10월'과 대기근

1925년 2월 19일 새로 창설된 카자흐 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당 제1서기에 임명되었고, 영어 사료는 그가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 자치공화국을 사실상 외부의 간섭 없이 통치했다고 기록한다. 러시아어 사료는 그가 1925년 10월부터 1933년 2월까지 카자흐 지역위원회 책임서기(제1서기)를 지냈다고 전하며, 임명 시점은 1925년 2월 19일설과 1925년 9월 12일설이 갈린다. 1925년 12월 키질오르다 당대회에서 그는 자기 도착 이전에는 카자흐스탄에 소비에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해 선임자들의 사업을 지우고 백지에서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것이 '소(小) 10월' 노선의 출발점이었다.

'소 10월'은 1926~1927년 카자흐스탄 당국이 지방 민족 엘리트를 억압하고 공화국 생활에 대한 행정적·경제적 통제를 강화하려 한 정치 노선의 이름이었다. 1927년 10월 혁명 10주년 즈음 그는 두 저작을 내어 비상조치의 확대와 아울(유목민 마을)에서의 내전적 노선을 정당화했고, 스탈린에게 '소 10월' 시행 승인을 요청하면서 다음 단계로 카자흐인의 대규모 정착화를 제시했다. 1928년 가을 첫 조치로 부유층 가호에 대한 몰수전이 진행되었는데, 700가호가 몰수 대상이 되어 약 15만 마리(소 환산)의 가축이 거두어졌다. 그가 인정한 바에 따르면 애초 계획은 1,500가호로 두 배 규모였으나 중앙위원회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 과정에서 기준(유목 400두, 반유목 300두, 정착 150두)이 조정되어 700가호로 줄었다. 카자흐어 사료에 따르면 1926~1927년의 토지 재분배로 부유 가호로부터 건초지 약 136만 데샤티나와 경작지 약 125만 데샤티나가 빈농·중농에게 넘어갔으며, 1928년 5월 3일 전연합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과 8월 28일 '바이 가호 몰수에 관한' 법령은 대축산가호의 몰수와 추방을 요구해 600가호를 추방하도록 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가 지방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부를 것을 잘 알면서 자기 견해를 공유하지 않는 당 지도자들과 싸웠다. 사드바카소프와 호자노프는 이미 1926년 '민족 편향' 혐의로 몰렸고, 세이풀린·누르마코프·멘데셰프 등도 박해를 받아 다수가 공화국에서 쫓겨났다. 1928년 말부터는 정치적 반대자들(바이투르시노프, 둘라토프, 아이마우이토프, 주마바예프)에 대한 첫 체포가 시작되었고, 2년 뒤에는 티니슈파예프를 비롯한 민족 지식인 다수가 체포되었다.

스탈린이 강제 집단화를 명령한 뒤 그는 유목 인구를 집단농장으로 강제 편입시켰고, 이는 치명적 기근을 낳았다. 1930년 말 시작되어 1933년까지 이어진 카자흐 대기근(아샤르쉬르리크)의 희생자는 대부분 카자흐인이었다. 널리 인용되는 사망 추정치는 130만~230만 명이며, 다른 추정으로는 약 175만 명 또는 200만 명 이상이 제기된다. 전체 카자흐인의 38~42퍼센트가 사망해 1930년대 초 소련 기근에서 민족별로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했고, 카자흐인은 공화국 인구의 약 60퍼센트에서 38퍼센트로 줄었다. 영어 사료는 사망자 150만 명(카자흐인 130만 명)과 카자흐인의 25~42퍼센트가 사망 또는 이주했다는 수치를 제시하고, 러시아어 사료는 공식 인구조사에 근거해 카자흐인 희생자를 최대 100만 명으로 보며, 카자흐어 사료는 약 300만 명설을 전한다. 기근 문서는 그 기제를 가축의 국가 징발, 전통적 이동로의 교란, 초원에 맞지 않는 집단농장으로의 강제 편입, 과도한 할당량과 지역 블랙리스트 지정으로 설명하며,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향하던 카자흐인 수천 명이 국경수비대에 총격당했다고 기록한다. 저항도 대규모로 일어나 1930년 한 해에만 8건의 봉기가 있었다.

비판이 거세지자 1932년 8월 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 의장 우라즈 이사예프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자기기만이라고 비난했고, 작가 가비트 무시레포프는 투르가이 지역에서 시체가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보고했으며, 서시베리아 당 책임자 로베르트 아이헤는 굶주린 카자흐인들이 시베리아로 넘어온다고 항의했다. 1932년 11월 11일 그는 이사예프와 함께 곡물 징수를 방해한다고 고발된 농민들의 대량 체포와 추방을 명령했다. 1933년 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막대한 성과'를 자랑했으나 며칠 뒤 해임되어 집단화 처리에 대한 공개 비판을 받았고, 카자흐스탄의 당 지도부는 레본 미르조얀에게 넘어갔다.

평가와 책임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이어진다. 그를 아는 혁명사 연구자 V. L. 부르체프는 그를 피에 막히지 않는 전형적 레닌주의자, '교수형 집행인, 잔인하고 퇴화의 요소를 지닌' 인물로 평하면서 '카자흐인을 사람으로 전혀 셈하지 않았다'고 썼다. 다만 그가 7년 동안 수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데, 1931년 4월 그는 직접 공화국의 10개 지역을 시찰했다. 한편 마나시 코지바예프가 이끈 카자흐스탄 의회 조사위원회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모스크바가 의도적으로 카자흐인을 겨냥했다며 이 기근을 대량학살로 규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스탈린의 공업화·집단화 추진에서 비롯된 당시 소련 전역의 기근의 일부로 본다. 1990년대 초 아빌호진과 타티모프는 이 기근을 '골로쇼킨의 대량학살'로 규정해 책임을 그에게만 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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