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티모페예비치 예르마시

Филипп Тимофеевич Ермаш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2 ○ 자연사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꾼 정체기 영화 총책

안드로폰프가 《시베리아다》를 보고 "이거 반소비에트 영화 아니냐"고 묻자, 예르마시는 "나도 시베리아인입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라고 답하며 영화를 지켰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내며 정체기 영화계를 총괄한 당 관료이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공병으로 참전했고, 콤소몰과 스베르들롭스크 당 기구를 거쳐 1962년 중앙위원회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가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이념 통제와 대중 흥행을 병행해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승무원》 등 블록버스터와 타르콥스키·콘찰롭스키의 작품을 모두 관리하며 소련판 스튜디오 시스템을 추구했다. 1986년 영화인대회의 비판 속에 물러났으나, 임기 중 소련 영화는 오스카 2개를 수상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고스키노 의장기의 검열 실무

고스키노는 영화 제작과 함께 검열을 담당한 국가기관이었고, 예르마시는 그 의장으로서 검열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다. 위원회 밑에서 일한 영화평론가 아르멘 메드베데프의 증언에 따르면, 예르마시는 고스키노 단계에서 검열이 가능한 한 부드럽게 작동하도록 자기 영향력을 행사했다. 살릴 수 있는 작품은 살렸고, 그럴 수 있다면 작품을 망가뜨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발라얀의 《잠 속의 비행》에 대해 위원회 간부들이 열다섯 건 안팎의 수정을 요구했을 때, 예르마시는 그 정도면 다른 영화를 찍어야 한다며 "이 영화가 소비에트 권력의 기초를 뒤흔듭니까"라고 물었고, 그 한마디가 작품의 운명을 결정했다.

통제는 금지령만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작품에 낮은 등급을 주거나 복사본 수를 적게 확정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사실상 안 보이게 만들 수 있었고, 배급 조직은 이를 정확히 알아채 반응했다. 반대로 전연합적 시사회와 대규모 복사본이 동원될 때는 그 영화를 모두가 보아야 한다는 신호였다. 예르마시 아래에서도 완성본은 여러 권력 단계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세르게이 솔로비요프의 《구조자》는 아프가니스탄 개입 직후 군 입대 장면 때문에 8개월간 반려되며 보충 촬영이 요구되었고, 예르마시는 정치국 승인을 확신하지 못해 브레즈네프 측근이던 콘스탄틴 체르넨코에게 다차에서 시사를 부탁하는 우회로를 택했다.

메드베데프는 예르마시의 판단에 편차가 있었다고 본다. 감독 및 그의 작품을 끝까지 감싼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승무원》 같은 예도 있었고, 금지가 풀린 작품을 구제하기도 했지만, 이반 라프신, 《호수》의 감독 알렉세이 게르만이나 《굴욕》 문제에서처럼 개인적 선호와 정치적 계산에 따라 판단이 흔들렸다는 것이다. 그의 재임기 통제는 한 사람의 취향만이 아니라 제도적 메커니즘과 상급 기관의 재량이 겹쳐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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