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재벌의 돈으로 극우 동맹과 대중지를 함께 사들인 후원자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74–1904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생, 파리에서 향수 사업 시작
- 1905–1920향수 산업에서 당대 최대급 재산 축적
- 1922《르 피가로》 인수
- 1925–1928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에 자금 지원
- 1928대중지 《라미 뒤 푀플》 창간
- 1933연대 프랑스 창설과 자금 지원
- 1934.07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사망
관련 역사 사건
향수 산업의 대량 시장 전환
코티의 향수 사업에서 갈림길은 1904년에 있었다. 그해 로즈 자크미노를 내놓으며 사업체를 세웠고, 이름은 어머니의 성 코티를 프랑스식으로 바꾼 것이었다. 처음에는 파리의 부유층을 겨냥한 고급품으로 출발했으나, 코티는 향수가 신분을 과시하는 사치품이라는 통념을 깨고 판매 대상을 넓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값싼 합성 향료와 천연 향료를 조합해 원가를 낮추고, 같은 향을 여러 가격대의 제품으로 내놓아 중간층과 노동자 계급 여성도 살 수 있게 했다. 코티 자신도 향수를 여전히 사치품으로 여겼지만, 그 사치품을 훨씬 넓은 고객에게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산은 1908년 파리 교외 쉬렌에 세운 향수의 도시에서 규모를 갖췄다. 이곳에는 9천 명이 일했고 하루 10만 병을 만들 수 있었다. 판매망도 달랐다. 관행대로 자기 가게에서만 팔지 않고 1905년부터 다른 소매상과 백화점에도 상품을 공급해 전국적, 나아가 국제적 시장을 만들었다. 제품군 역시 향수에 그치지 않고 크림, 비누, 목욕용 소금, 립스틱, 심지어 문구류까지 같은 브랜드로 묶은 향료 제품군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당시로는 앞선 시도였다. 오리간 분말은 프랑스에서만 연 1천6백만 개가 팔렸고 미국에서만 하루 3만 개의 금속 분갑이 나갔다.
다만 이 팽창은 상품 구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라리크의 병처럼 포장과 디자인에 돈을 쓰는 전략은 매출을 끌어올린 동시에, 코티가 자기 사업의 거의 모든 측면을 직접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경영상의 부담과 맞물려 있었다. 미국 법인의 이익이 1923년 1백만 달러에서 1929년 5천만 달러 매출로 뛰는 동안에도, 유럽 자회사를 미국 법인이 흡수한 구조는 이후 대공황기에 값싼 가격 정책과 겹쳐 브랜드의 격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향수를 대량 시장의 상품으로 바꾼 사람이라는 평가와, 그 시장을 지탱한 조직이 창업자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매달려 있었다는 지적은 같은 과정의 양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