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에서 총국장으로, 제 침대에서 죽은 굴라크 행정가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경력 연표
- 1924–1927솔로프키 수용소 죄수에서 행정가로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공사 책임자
- 1933–1937BAM 수용소장
- 1937–1947NKVD·MVD 철도건설총국장
- 1947중장 계급과 연금으로 퇴역
관련 역사 사건
식량 기준제: 노동하는 만큼 먹는다
프렌켈이 솔로프키 수용소에서 도입한 '식량 기준제'(шкала питания)는 굴라그를 단순한 감금 시설에서 강제노동 경제 기관으로 전환시킨 핵심 장치였다. 1924년 당시 수용소는 발진티푸스와 극심한 비효율로 신음하고 있었는데, 프렌켈은 죄수들을 세 등급(중노동 가능자, 경노동 가능자, 노동 불능자)으로 분류하고 각 등급별 노동 할당량과 식량 배급을 정밀하게 연동시켰다.
중노동 등급 죄수에게는 하루 빵 800그램과 고기 80그램이 지급된 반면, 노동 불능자는 그 절반만 받았다. 규정 노동량을 채우지 못하면 배급은 더 깎였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져 노동량이 다시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 죄수는 몇 주 만에 사망했다. 이 체계는 '노동능력'(трудоспособность)을 유일한 가치로 삼았기에, '재교육'이라는 본래의 수용소 이념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수용소 신문은 폐간되었고, 정치범과 형사범의 구분도 사라졌으며, 죄수들은 오로지 노동력 단위로만 평가되었다.
1926년까지 이 체계로 솔로프키 수용소는 흑자로 전환되었고, 프렌켈은 수용소 경제상업부(ЭКО ЭКЧ)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서는 카렐리야 지역 민간 사업체들과 입찰 경쟁에서 이겨 13만 입방미터의 벌목권을 따냈고, 지역 은행의 주주가 되었으며, 포로들을 본토의 도로 공사와 벌목장에 파견했다. 카렐리야 지방 당국은 'SLON은 움켜쥐는 큰 손을 가진 상인(коммерсант)이며, 이윤 추구가 기본 목표'라고 항의했으나, 수용소 경제가 창출하는 실적 앞에서 이러한 불만은 묻혔다.
안네 아펠바움은 이렇게 평한다: "프렌켈이 체계의 모든 측면을 발명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감옥을 수익성 있는 경제 기관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스탈린이 주목할 시기와 장소에서 그렇게 했다." 이 체계는 이후 전 소련의 굴라그로 확산되었고, 프렌켈 자신은 그 원리를 백해-발트 운하, BAM, 그리고 굴라그 철도 건설 전반에 걸쳐 적용하며 수백만 명의 죄수 노동력을 소련 공업화의 동력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