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즈네프의 후계 후보였으나 급서로 고르바초프의 자리를 열어준 농업 담당 서기
1978년 4월 농업 전원회의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농업 담당 정치국원 겸 서기인 쿨라코프를 위원회에조차 넣지 않았다. 석 달 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농민 출신으로 농업 전문가 경로를 밟아 올라온 당 간부로, 1965년부터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를 맡으며 브레즈네프·수슬로프·키릴렌코와 함께 서기국과 정치국을 겸한 4인 중 하나였다. 스타브로폴 제1서기 시절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후원했으며, 1971년 정치국 위원에 오른 후 서방 분석가들은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꼽았다. 그러나 1978년 농업 정책을 둘러싼 당내 비판 속에 급서하면서 그의 서기국 자리는 고르바초프에게 넘어갔고, 이는 소련 지도부 세대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다.
경력 연표
- 1938–1941탐보프 주 사탕무 국영농장 조수, 펜자 주 사탕공장 농업기사
- 1941–1944펜자 주 지구 콤소몰 제1서기, 지구 집행위원회 의장, 현급 당위 제1서기
- 1950–1955펜자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55–1959RSFSR 농업 차관
- 1959–1960RSFSR 곡물생산물 장관
- 1960–1964스타브로폴 변경당위 제1서기 — 고르바초프를 발탁·후원
- 1964–1976중앙위 농업부장
- 1965–1978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71–1978정치국 위원 (후보위원 건너뜀)
관련 역사 사건
의문의 급서와 후계 구도
1970년대 후반 쿨라코프는 정치국 위원이면서 서기국 서기를 겸임한 유일한 60대였다. 브레즈네프, 수슬로프, 키릴렌코보다 한 세대 젊었기에 서방 분석가들은 그를 가장 유력한 후계 후보로 지목했다. 그러나 1978년 초 분위기가 급변했다. 4월 농업 전원회의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농업 담당 정치국원 겸 서기였던 쿨라코프는 위원회에조차 포함되지 않았고 위원장은 코시긴이 맡았다. 7월 4일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농업 부진을 이유로 공개 비판을 받았다.
7월 16일 밤, 쿨라코프는 모스크바 근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공식 사인은 '급성 심부전에 의한 심장 정지'였다. 그러나 당 안팎에서는 권총 자살설, 심지어 암살설까지 끊이지 않았다. 스타브로폴 시절부터 쿨라코프의 측근이었던 표도르 모르군은 회고록에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당 중앙기구 안팎에서 끈질기게 돌았다'고 기록했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손목을 그었다는 설과 권총 자살설을 함께 전하면서도, 고르바초프의 회고를 인용해 '가족 간 큰 말다툼이 있었고 밤새 아무도 곁에 없었다'고 적었다. 한편 미하일 스미르튜코프는 침대 옆에 빈 코냑 병 두 개가 놓여 있었다는 증언을 남겨 과도한 음주가 직접 원인이라는 설을 제기했다.
장례식은 정치적 신호로 가득했다. 브레즈네프, 코시긴, 수슬로프, 그리고 펜자 시절부터 인연이 깊었던 체르넨코마저 불참해 고인의 '실각'을 방증했다. 장례위원장은 키릴렌코가 맡았고, 추도 연설은 고르바초프가 했다. 이는 고르바초프가 붉은광장 연단에 선 첫 무대였다. 몇 달 뒤 고르바초프는 쿨라코프의 농업 담당 서기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으며 중앙 정치 무대에 진입했다. 쿨라코프의 죽음은 소련 지도부 세대교체의 예기치 못한 분수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