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외교관이자 내부 붕괴의 증인
1943년 7월 25일, 치아노는 장인 무솔리니의 축출을 뜻하는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핵심 외교관으로, 정권의 팽창과 독일 의존을 추진하면서도 전쟁의 파국이 다가오자 그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전쟁과 알바니아 침공, 그리스 공격을 지지했으며 외무장관 재임 중 외교 기록과 일기를 남겼다. 1943년 7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디노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해 무솔리니 축출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특권적 지위가 보존될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독일로 달아났다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 넘겨진 그는 베로나 재판 뒤 처형되었고, 그의 일기는 파시즘 내부의 책임과 붕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다른 이름: 잔 갈레아초 치아노 · 치아노 백작
주요 활동과 소속
- 1936–1943 외교·국제활동 · 이탈리아 국가기관
- 1922–1943 정치·당 지도 · 이탈리아 국가파시스트당
경력 연표
- 1925법학 학위 취득 뒤 외교관으로 전환
- 1935–1936언론·선전 장관, 에티오피아 전쟁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
- 1936–1943이탈리아 왕국 외무장관
- 1939독일과의 강철 조약 체결에 참여
- 1943.02–07바티칸 주재 대사
- 1943.07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
- 1944.01베로나 재판 뒤 총살
관련 역사 사건
베로나 재판과 처형, 1944
1943년 7월 24일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디노 그란디의 결의안을 19대 8로 통과시켰고, 무솔리니는 축출과 체포로 이어졌다. 1943년 9월 그란사소 습격으로 구출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수반이 되자, 독일 당국의 요구에 따라 투표자들에 대한 재판이 준비되었다. 1944년 1월 베로나에서 열린 이 재판에서 체포된 6명 가운데 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중에는 갈레아초 치아노도 있었다. 툴리오 치아네티는 감형되어 30년형을 받았으며, 체포되지 않은 13명은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