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진을 이끈 신부, 이중 첩자로 끝나다
피의 일요일 직후 가폰은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 오늘 피의 강이 차르와 러시아 민중을 갈라놓았다. 이제 러시아 노동자는 차르 없이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1905년 1월 9일, 15만 노동자의 겨울궁전 청원 행진을 이끌었으나 군대가 발포했다. 살아남아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는 격문을 남겼지만, 경찰과의 이중 관계가 드러나 이듬해 SR 전투단에 처형당했다.
경력 연표
- 1902–04경찰 후원 합법 노동회(주바토프식) 「공장노동자회」 조직
- 1905.1.9겨울궁전 청원 행진 인솔, 피의 일요일
- 1905–06망명, 혁명 정당들과 접촉
- 1906경찰 내통이 드러나 SR 전투단에 처형
관련 역사 사건
경찰과의 이중 관계와 최후
1902년 가을, 가폰은 경찰국 특별부장 세르게이 주바토프와 접촉했다. 주바토프는 혁명 선전에 대항하기 위해 경찰 통제 하의 합법 노동조합을 만들고 있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미 인기를 얻고 있던 가폰을 이 사업에 끌어들였다. 가폰은 주바토프의 후원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러시아 공장노동자회'를 조직했으나, 처음부터 경찰을 속일 계획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들을 모두 코로 꿰고 있었다. 내 계획 전체가 바로 그 위에 세워졌다"고 훗날 털어놓았다. 그는 경찰의 간섭을 대폭 제한하는 새 정관을 직접 작성했고, 표트르 두르노보 내무차관의 승인을 받아 1904년 2월 정식 발족했다. 가폰은 이반 풀론 시장과 개인적 친분을 쌓아 자신의 조직에 경찰이 전혀 출입하지 못하게 했으며, 내부에는 '비밀위원회'를 만들어 비합법 문헌을 읽고 무장봉기까지 논의했다. 1905년 1월 9일까지 당국은 가폰 조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피의 일요일은 이들에게 완전한 충격이었다. 해외 도피 후인 1905년 여름, 가폰이 경찰과 접촉을 재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사료상 확실히 입증되지는 않았다. 귀국 후 가폰은 세르게이 비테 백작과 협력하며 10월 17일 선언이 약속한 개혁 노선을 지지했다. 1906년 2월,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는 가폰이 당국의 첩자이며 혁명을 배신했다고 결론 내렸다. 피의 일요일에 그를 구출했던 핀하스 루텐베르크가 오제르키의 빈 별장으로 유인했고, 그곳에서 동지재판 끝에 교수형에 처했다. 향년 3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