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위기서 진주만 비유로 공습을 저지하고, 베트남전에서 홀로 확전을 반대한 국무차관
기습으로 쿠바를 치는 건 진주만과 똑같은 짓이다. 그게 어디로 갈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미사일을 다 제거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국무차관(1961–1966)으로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두 행정부에서 복무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이라는 냉전의 두 결정적 순간에 확전을 반대한 예외적 인물이었다. 1962년 10월 EXCOMM에서 기습 공습을 '또 하나의 진주만'이라 규정하며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다수를 봉쇄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1965년까지 베트남 파병 확대에 홀로 반대하는 각료 내 유일한 반대자가 되었다. 퇴임 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향된 중동 정책을 비판했고, 유럽 통합의 초기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장 모네와 함께 슈만 계획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61–1966 외교·국제활동 · 미국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33–1942시카고에서 변호사 활동
- 1942–1945렌드리스 관리국 · 전략폭격조사단
- 1946–1961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공동 창립
- 1961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 1961–1966국무차관
- 1968유엔 주재 미국 대사
- 1969–1982리먼 브라더스 선임 전무이사
관련 역사 사건
1963년 8월 쿠데타 전문과 디엠 축출 결정
베트남 확전에 반대한 것으로 기억되는 볼이 1963년 8월에는 남베트남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한 결정 과정에 가담했다는 점은 그를 단순한 반전 인물로만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해 여름 응오딘지엠 정권이 불교 탄압을 강화하자 국무부의 W. 애벌 해리먼과 로저 힐스먼, 국가안보회의의 마이클 포레스털은 지엠을 축출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들은 고위 당국자들이 대부분 자리를 비운 8월 24일 토요일, 사이공의 헨리 캐벗 로지 대사에게 남베트남 장군들에게 쿠데타를 권고하라는 전문을 작성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처음에는 백악관 복귀 후로 결정을 미루려 했으나 포레스털의 설득으로 국무부의 승인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해리먼과 힐스먼이 찾아간 사람이 바로 국무차관 볼이었다. 볼은 지엠이 물러나야 한다는 그들의 판단에 동의했고, 케네디가 이미 용인한 것처럼 딘 러스크 국무장관의 서명을 받아냈다. 볼은 이어 러스크의 승인을 케네디에게 전달했고 케네디는 다른 당국자들의 의견도 확인하라고 요구했다. 그날 밤 공식 명칭 243호 전문이 사이공으로 발송되었고, 여기에는 지엠이 고집을 부릴 경우 '지엠 자신도 보존될 수 없다'는 문구가 담겼다. 볼의 개입은 우연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결정적이었다. 8월 26일 월요일,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존 매콘 CIA 국장, 맥스웰 테일러 합참의장은 쿠데타 조장에 반대하며 정상적 결정 절차를 우회한 것을 문제 삼았지만, 케네디가 전문을 철회할 뜻이 있는지 묻자 아무도 그렇게 하자고 답하지 않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공습을 '또 하나의 진주만'이라며 막아섰던 인물이 1년 뒤에는 남베트남 정권 교체를 촉진하는 데 가담한 셈이며, 이는 그의 판단이 냉전의 개별 국면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