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파산을 경고했으나 체제를 구하지는 못한 국가계획위원장
내가 정치국에서 호네커에게 이 정책을 경고했을 때 나는 '사보타주'로 일축됐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65–1989 경제·재정·계획 · 동독
경력 연표
- 1936–1939기계공 훈련
- 1939–1945루프트바페 복무, 비행 교관
- 1948SED 입당
- 1955–1958모스크바 공산당 고등학교 수학
- 1960–1962SED 중앙위 계획·재정·기술부장
- 1962–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1965년 위원장 승진
- 1965–1989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겸 각료회의 간부위원
- 1973–1989SED 정치국 후보위원, 1989년 11월 정위원
관련 역사 사건
1988년 쉬러-미타크 논쟁: 서면 요구와 '검토 결과'
1965년부터 국가계획위원회를 이끈 쉬러는 1980년대에 이르러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970년대 초부터 이 노선은 유치원 자리, 유급 출산휴가, 임대료 보조, 최저임금·연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대규모 주택건설로 요약되는 사회정책을 밀어붙였고, 그 비용은 생산설비의 급속한 마모, 생태적 남용, 누증하는 대내외 부채, 특히 생산 부문의 낮은 축적률로 지불되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국가 파산이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1988년 봄, 매년 그렇듯 사회주의통일당(SED) 기구가 이듬해 국민경제·국가예산계획을 다루던 중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4월 26일,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인 쉬러는 계획 초안에 호네커 개인에게 보내는 서신을 덧붙였다. 그는 비사회주의 경제권(NSW)에 대한 대외 부채가 두 자릿수 억 마르크 규모로 불어난 데다 계획 자체에 산출·배분의 불균형이 남아 있다는 점을 들어 경제정책의 전환을 요구했다. 국가보안부는 1989년 국민경제계획 작성 경과와 쉬러의 요구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호네커는 이 서신을 '검토'를 위해 경제 담당 정치국 위원인 중앙위원회 경제비서 귄터 미타크에게 넘겼다. 미타크의 '검토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경제 문제를 맡은 정치국 위원들은 미타크의 문건에 사전 동의했고, 호네커는 이를 최고책임자 사안으로 정치국에 공식 상정했다. 토론에서 미타크는 쉬러의 문건이 앞선 당대회 결정, 즉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을 문제 삼는다는 논리로 그것을 일축했다. 쉬러는 정치국 위원들 앞에서 비판을 진술할 기회를 얻었으나, 미타크는 이 비판을 거부하고 모든 문제의 책임을 국가계획위원회에 돌렸으며 호네커가 그에게 동조했다. 그것으로 사안은 종결되었다. 실제 경제 상황은 당 결정의 '무오류'와 어긋났지만, 미타크는 당 이익을 앞세워 현실을 외면하고 불균형 계획안의 책임을 국가계획위원회에 전가했다. 굳어진 지도 구조와 구조적 개혁 불능 때문에 정책 전환은 불가능했고, 수정을 실행하는 것 자체가 오류의 인정이 되어 지도부의 무오류성과 권력 주장을 흔들었을 것이다. 쉬러의 서면 요구는 이렇게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