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로프 팀에서 출발해 소련 수소폭탄 역사의 수석 기록자가 된 물리학자
사하로프조차 비밀에 부친 '제3의 아이디어'의 수수께끼에서, 곤차로프는 그 실마리가 푹스의 1948년 보고서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하로프의 이론 부서에서 출발해 RDS-6s, RDS-37, 차르 봄바 개발에 참여하고 메가톤급 신형 전하 설계를 제안한 소련의 핵물리학자다. 냉전 후기 옐친 정부 아래 소련 핵무기 문서고의 수석 해제자로서 다권본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를 편찬했으며, 클라우스 푹스의 1948년 보고서와 '제3의 아이디어'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으로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기록 작업은 1955년 방사선 내파 설계가 독자적 성취인지 간첩 정보에 힘입은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실증적 토대가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52– 과학·기술 · 소련 ·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경력 연표
- 1952KB-11(아르자마스-16) 실험원자로부 선임연구보조원, 이후 엔지니어
- 1953KB-11 이론부서 정식 연구원(사하로프 휘하)
- 1955RDS-37 2단계 열핵전하 설계·계산 공동 수행
- 1961차르 봄바(RDS-220) 물리 설계 참여
- 1965메가톤급 열핵전하 신설계 방향 제안, 1966년 시험 성공
- 1967–2004VNIIEF 이론부서장
- 1990년대–2009『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다권본 책임 편찬자, 핵무기사 연구
- 2002–2009VNIIEF 이론·수리물리연구소 수석연구원
관련 역사 사건
문서고의 해제자, '제3의 아이디어' 수수께끼에 답하다
곤차로프는 1990년대 이후 자신이 직접 만든 무기의 역사를 문서로 되짚는 작업으로 전환했다. 옐친 시기 소련 핵무기 문서고 해제 작업의 중심 인물로서 다권본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문서와 자료』의 책임 편찬자를 맡았고, 1996년에는 미국과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사를 비교한 논문과 『피직스 투데이』 기고를 통해 역사 서술 자체에 개입했다.
그가 던진 핵심 물음은 사하로프조차 명확히 남기지 않은 '제3의 아이디어', 즉 1955년 RDS-37로 실현된 2단계 방사선 내파 설계의 기원이었다. 곤차로프의 가설은 그 실마리가 클라우스 푹스가 1948년 봄 넘긴 보고서에 있었고, 1954년 3월 1일 미국의 캐슬 브라보 시험(약 1500만 톤)과 슬로이카(약 40만 톤)의 40배 격차가 그 기억을 되살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격차가 1954년 소련 프로젝트 관계자들에게 실제로 인식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가설은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경합하는 해석 중 하나였다. 미국 쪽 수소폭탄 참여자 출신 역사가 토머스 리드는 1951년 텔러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푹스의 지식이 미국 물리학자들을 자극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1954년의 별도 간첩 활동을 주장했고, 역사학자 겐나디 고렐릭은 사하로프가 푹스 보고서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독자적 독법을 제시했다. 사하로프 본인은 회고에서 두 이론 부서의 여러 사람이 '제3의 아이디어'에 거의 동시에 도달했다고만 적었다.
곤차로프의 작업이 지닌 의미는 결론의 확정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토대를 놓은 데 있다. 그가 편찬한 사료와 해제된 문서는 1955년 설계가 독자적 성취인지 간첩 정보에 힘입은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을 추정에서 문서 비교의 영역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