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핀란드계 노동운동가이자 네 차례 대선 후보
'미국의 사회주의는 투표함을 통해 올 것이다' — 1996년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와의 인터뷰에서.
핀란드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철강 파업 현장에서 성장하여 41년간 미국 공산당을 이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하고 스미스법으로 투옥된 후 당권을 장악, 모스크바 노선에 충실히 경도되어 네 차례 대선에 출마한 냉전기 미국 공산주의의 얼굴이었다.
경력 연표
- 1927미국 공산당 입당, 청년공산주의동맹 조직가
- 1931–1933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35–1937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SWOC) 창립 참여, '리틀 스틸' 파업 주도
- 1939클리블랜드 CPUSA 지도자
- 1942–1946미 해군 기계병 복무 (괌)
- 1948–1957스미스법 기소, 리븐워스 연방교도소에서 5년 이상 복역
- 1959–2000CPUSA 서기장·의장
- 1972–1984CPUSA 대통령 후보 (4회 출마)
관련 역사 사건
"리틀 스틸" 파업과 노동운동
1934년 오하이오주 마호닝 밸리로 이주한 거스 홀은 영스타운의 제철소에 취업하여 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SWOC)의 창립 조직가로 활동했다. 당시 철강 산업의 조직화는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했다. 노조 가입 서명 사실이 드러나면 즉시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홀은 훗날 전미철강노조(USWA)에 보낸 서한에서 "수천 장의 서명 카드를 모은 후에야 존 L. 루이스가 SWOC 설치에 동의했다"고 회고했다. 홀은 루이스에게 서명카드를 전달한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이후 SWOC 상근 조직가로 고용되어 마호닝 밸리 전역에서 1만 명의 노동자를 철강노조에 가입시켰다.
1937년 5월 26일, US스틸과의 계약 체결에 성공한 SWOC는 공화국철강(Republic Steel), 베들레헴철강, 영스타운시트앤튜브 등 이른바 '리틀 스틸' 기업들을 상대로 파업에 돌입했다. 홀은 워런과 영스타운 지역 파업위원회 의장으로서 파업을 지휘했다. 이 파업은 1930년대 가장 폭력적인 노동쟁의 중 하나로, 시카고 공화국철강 공장 앞에서 경찰이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여 10명이 사망한 '현충일 학살'(1937년 5월 30일)을 포함해 18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홀은 워런 공장으로 폭발물 제조 재료를 운반한 혐의로 체포되어 경범죄를 인정하고 500달러의 벌금을 냈다.
파업은 5개월 만에 노조 승인이라는 주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종결되었으나, 리틀 스틸 산업의 노조 조직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으며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마침내 노조 승인이 이루어졌다. SWOC는 1942년 전미철강노조(USWA)로 발전했다. USWA 초대 위원장 필립 머레이는 훗날 워런과 영스타운에서의 홀의 파업 지도력을 "효과적인 풀뿌리 조직화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이 경험은 홀이 전국적인 노동 지도자로서 명성을 쌓고 CPUSA 지도부로 진입하는 발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