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룽

贺龙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마오주의 중국 중국 1896.3.22.–1969.6.8. ○ 옥사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후난의 사나이, 난창 봉기 총지휘와 제2방면군 사령관

후난 상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전설을 남겼고, 1927년 난창 봉기를 지휘한 뒤 제2방면군을 이끌고 대장정에 올랐다.

후난 서부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방 무장을 이끌다 국민혁명군 군장이 되었고, 1927년 8월 1일 난창 봉기의 총지휘를 맡은 직후 입당했다. 후난·후베이 서부에 근거지를 세우고 대장정에서 제2방면군을 이끌었으며 항일전쟁기 120사단장이었다. 건국 후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과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린뱌오·캉성의 공격을 받아 감금되었고 1969년 치료를 거부당한 채 사망했다. 1974년 복권되었다.

다른 이름: 하룡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국방공업 지도부와 1960년대 초 품질 정풍

1959년 11월, 국무원 제1기계공업부장 자오루(趙爾陸)가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회에 국방공업의 품질 문제를 보고하자, 허룽은 국방공업 관리 체제를 고쳐 당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의 지도 아래 국방공업위원회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1960년 1월 5일 당중앙이 국방공업위원회 설치를 승인하고 그를 주임으로 임명했으며, 녜룽전·리푸춘·보이보·뤄루이칭·샤오진광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국방공업위원회는 국방공업을 연구·계획하는 협의 기구로서 행정 기구가 아니었고, 별도로 사무기구를 두어 일상 업무를 처리했다.

허룽은 취임 직후 국방공업 기밀이 신문에 공개되는 것을 금지하는 엄격한 보안 규율을 세웠다.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국방공업을 맡아 일한 시기는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제1기계공업부가 통괄하던 국방공업의 품질 관리를 바로잡는 일에 착수했고, 자신을 포함한 지도부와 함께 1년 동안 전국의 중점 군수 공장을 돌아보며 대규모 현지 조사를 벌였다.

이 조사에서 드러난 문제는 대부분 공장 건설의 질이었다. 청두의 항공기 공장과 항공발동기 공장에서는 벽돌과 유리창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는 등 부실한 시공이 확인되었고, 부설을 지적한 허룽은 “항공발동기 공장을 이렇게 지어서야 되겠느냐”고 따졌다. 1960년 5월 10일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는 국방공업 생산에 “품질 제일, 품질을 보장하는 기초 위에서 수량을 늘린다”는 방침을 명확히 내걸고, 수량과 생산액만 좇고 품질을 돌보지 않는 관점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허룽은 관련 보고를 당중앙에 올렸고, 같은 해 7월 1일 당중앙이 이를 승인했다.

1960년 11월 말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국방공업 시스템 3급 간부회의가 베이징에서 열려 부·국·공장 간부 400여 명이 참가했고, 회의장에서는 1309점의 열등 군수품 전시도 열렸다. 허룽은 회의에서 먼저 자기 비판을 했으며, 회의는 국방공업 건설에서 지켜야 할 열일곱 조 항의 준칙을 정하고 품질 정풍을 결정했다. 중국 국방공업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이 조치는 “대약진 운동”의 편향을 바로잡고 군수품 품질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