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래부셰어

Henry Labouchère

남성 간 모든 성행위를 처벌한 「래부셰어 수정조항」을 만든 자유당 의원

1885년 동성애와 무관한 법안에 막판 수정조항을 붙여 남성 사이의 「중대한 외설」을 처벌하게 했고, 10년 뒤 이 조항으로 와일드가 처벌받았다.

위그노계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영국의 정치인·언론인·극장주. 외교관을 지낸 뒤 1865~1868년 의원을 지냈고, 《데일리 뉴스》 지분과 1876년 창간한 주간지 《트루스》로 이름을 떨쳤다. 1880년 노샘프턴의 자유당 의원으로 돌아와 급진파의 중심이 되었다. 1885년 「래부셰어 수정조항」으로 남성 간 모든 성행위를 범죄로 만들었고, 와일드의 2년형도 짧다고 했다. 여성 참정권과 유대인에 적대적이었다. 1906년 정계를 떠나 피렌체로 물러났고 1912년 그곳에서 숨졌다.

다른 이름: 헨리 뒤프레 래부셰어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수정조항을 만든 급진파

이튼과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녔으나 도박과 시험 부정 의혹으로 학위를 받지 못했다. 1854~1864년 워싱턴·뮌헨·상트페테르부르크·콘스탄티노플 등에서 하급 외교관으로 일하다 무례한 편지로 쫓겨났고, 1865년 자유당 의원이 되었다. 1870~1871년 파리 포위전 통신으로 《데일리 뉴스》의 부수를 되살렸고, 1876년 창간한 개인 주간지 《트루스》는 숱한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렸다. 그는 《트루스》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조롱했고, 「히브리 남작들」을 공격하는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였다.

1880년 무신론자 찰스 브래들로와 함께 노샘프턴의 두 의석을 차지했고, 그 자신을 「노샘프턴의 기독교도 의원」이라 비꼬았다. 1885년 그는 동성애와 아무 관계가 없는 법안, 곧 동의 연령을 16세로 올리는 형법 개정법에 막판 수정조항을 붙였다. 남색은 이미 범죄였지만 이 「중대한 외설」 조항은 남성 사이의 모든 성행위를 범죄로 만들었다. 10년 뒤 이 조항으로 기소된 와일드가 최고형 2년 강제노동형을 받았을 때, 그는 원래 제안했던 7년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형이 짧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자유당 급진파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를 묶으려 했으나 1886년 자치 법안을 둘러싼 분열로 실패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반대로 끝내 장관이 되지 못했고, 보어 전쟁 반대로 인기를 잃었다. 1905년 자유당 정부에서도 자리를 얻지 못하자 이듬해 정계를 떠나 피렌체로 물러났고, 1912년 그곳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