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폭탄에서 토카막까지, 두 핵 시대의 이론물리학자
1953년 첫 수소폭탄 실험 성공과 함께 탐은 무기 연구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남은 18년을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에 바쳤다.
이고리 탐은 체렌코프 복사를 일리야 프란크와 함께 해명하여 195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자다. 1934년부터 사망까지 FIAN 이론부장으로 탐 준위·탐-댄코프 근사 등 기초물리학에 기여했고, 1948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수소폭탄 개발에 투입되어 1949~1953년 아르자마스-16 이론그룹을 이끌며 사하로프·긴즈부르크 등과 '슬로이카' 설계로 1953년 8월 소련 첫 열핵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1951년 사하로프와 제안한 토카막 자기밀폐 핵융합 개념은 ITER로 이어지는 주류 핵융합로의 토대이며, 후기에는 '300인의 편지'(1955)와 스탈린 복권 반대 성명(1966)에 서명했다.
경력 연표
- 1918모스크바대학 졸업
- 1924–1930모스크바대학 강사 → 이론물리학 주임
- 1934–197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이론부장
- 1949–1953아르자마스-16 열핵폭탄 이론그룹장
- 1951사하로프와 토카막 개념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8노벨 물리학상 (체렌코프 복사 해명)
- 1966스탈린 복권 반대 25인 성명 서명
관련 역사 사건
탐 학파 —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의 인재들
이고리 탐은 1920년대부터 모스크바대학 물리학부 이론물리학 강좌를 맡아 거의 반세기에 걸쳐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의 핵심 인재들을 길러냈다. 그가 키운 제자 군단은 단순한 강의실 인연을 넘어 '탐 학파'라 불릴 만큼 독자적인 학문 공동체를 형성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제자는 안드레이 사하로프로, 탐은 1948년 수소폭탄 프로젝트에 사하로프를 직접 발탁했고 이후 토카막 개념을 함께 제안했다. 20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비탈리 긴즈부르크 역시 탐의 지도 아래 초전도 이론을 발전시켰고, '케미컬 레이저'의 아버지로 불리는 레오니트 켈디시,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오브닌스크)를 설계한 드미트리 블로힌체프, 소련 중성미자 물리학을 개척한 모이세이 마르코프, 양자장론의 블라디미르 카디솁스키, 응집물질물리학의 세묜 알트슐레르와 다비트 키르주니츠 등이 모두 탐의 강의실과 FIAN 이론부 세미나에서 성장했다.
탐의 세미나는 모스크바 이론물리학계의 명물이었다. 매주 열린 이 자리에서 탐은 발표자를 가차 없이 질문으로 몰아붙였지만, 그 엄격함 속에는 학문적 정직성과 물리적 직관을 최우선시하는 태도가 있었다. 긴즈부르크는 후일 "탐은 결코 권위로 누르지 않았고, 모든 논쟁은 오직 진리를 향해 있었다"고 회고했다. FIAN 이론부는 오늘날 '이고리 탐 기념 이론물리학부'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이 전통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