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원자폭탄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의 과학 책임자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0– 과학·기술 · 소련 ·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경력 연표
- 193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M. M.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 발견
- 1935우랄 물리기술연구소 전기현상부장, 스베르들롭스크 이주
- 1936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37–1944우랄 공업대학 일반물리학 주임교수
- 1942대전류 측정 장치 발명으로 스탈린상 3급 수상
- 1943제2연구소 합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 위원
- 1950원자력연구소(IAE) 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0–1984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 1969물리·수학 대중과학잡지 《크반트》 공동 창간, 초대 편집장
관련 역사 사건
가족과 전시기의 내력
이사크 키코인은 1908년 3월 15일(구력) 코벤주 말리예 자고리(현 리투아니아 자가레)에서 태어났다. 부친 쿠셸 이사코비치 키코인은 민스크주 이구멘 출신으로 1904년부터 자고리의 국립 유대인 학교 교사 겸 교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부냐 이즈라일레브나 마이오피스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유대인 주민이 전선 지대에서 추방되면서 가족은 비텝스크주 류친으로, 1916년에는 프스코프주 오포치카로 옮겼다. 이사크는 오포치카에서 학교를 시작했고, 1921년 가족이 프스코프로 이주하자 1923년 제1통일노동학교를 마치고 지방측량 전문학교 3학년에 들어갔으며, 1925년 측량사 자격을 얻어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물리역학부에 입학했다.
전쟁은 가족을 갈라놓았다. 어머니 부냐 마이오피스는 1942년 2월 프스코프 유대인 주민 학살 과정에서 총살당했다. 이사크 본인은 우랄에 있었다. 1933년 디플로마 학생 미하일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의 광자기전기 효과를 발견했고(키코인-노스코프 효과), 1935년 학위를 마친 뒤 우랄 물리기술연구소 부서장을 맡아 같은 해 스베르들롭스크로 옮겨 1944년까지 우랄 공과대학에서도 가르쳤다. 학위 연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갈린다. 러시아 쪽 기록은 1935년 방어로 적고, 다른 기록은 1936년으로 둔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의 부서는 국방 과제로 전환해 야금과 전기분해에 쓰이는 강전류 직류 전류계를 개발했고, 이 공로로 1942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다만 이 상의 사유에 대해서는 대전차 지뢰용 자기식 신관의 발명·생산 도입이라는 다른 기록도 전한다.
1943년에는 쿠르차토프의 제2연구소에 합류하는 한 해이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이사크 쿠셸레비치 키코인이며, 부칭의 쿠셸은 부친의 이름이다. 동생 아브람 키코인도 물리학자였고, 훗날 형제는 함께 물리 교과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