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데 봉기의 첫 총사령관
레팽앙모주 출신의 행상인이자 성당 사무원. 징병과 성직자 시민법을 둘러싼 반발로 1793년 3월 무장 봉기에 나섰고, 6월 12일 수뮈르에서 방데 지도자들의 회의로 총사령관에 추대됐다. 6월 29일 낭트 공격 중 치명상을 입고 7월 14일 숨졌다.
앙주 지방의 행상인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1793년 징병 반대 봉기에 가담했다. 여러 농민 부대를 결집시키며 가톨릭 왕당군의 첫 총사령관으로 선출됐다. 낭트 공격에서 입은 총상으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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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왕당군총사령관대표
군사·지휘
경력 연표
- 1793.03.12생플로랑 르 비에유에서 봉기가 일어난 뒤 이웃 주민을 모아 잘레로 행군했고, 27명이 그를 따랐다.
- 1793.03.13잘레에서 첫 전투를 치러 성과 대포를 빼앗았고, 이어 스토플레와 함께 셀레를 점령했다.
- 1793.04.23–05.05보프레오를 점령하고 투아르 전투에서 승리했다.
- 1793.05.16–06.09퐁트네르콩트에서 패했으나, 몽트뢰유벨레와 수뮈르를 점령하며 만회했다.
- 1793.06.12수뮈르 함락 뒤 방데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가톨릭 왕당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됐다.
- 1793.06.294만 명을 이끌고 낭트를 공격하다 창문에서 쏜 총에 치명상을 입었다.
- 1793.07.14생플로랑 르 비에유로 옮겨져 부상으로 숨었다.
관련 역사 사건
혁명기의 선택과 정치적 맥락
카틀리노의 지도력은 방데 봉기를 귀족이 농민을 일방적으로 지휘한 반혁명으로만 볼 수 없게 한다. 그는 앙주의 행상인이었고, 징병·종교·지역 질서에 대한 불만이 결합한 농민 동원 속에서 총사령관으로 선출됐다. 가톨릭 왕당군이라는 이름은 종교와 왕정이 결합한 상징을 보여 주지만, 참여자의 동기와 지역적 조건은 하나가 아니었다.
1793년의 방데전쟁은 공화국이 대외전쟁과 내전을 동시에 치른 배경이었다. 카틀리노의 죽음 뒤에도 전쟁은 계속됐고, 양쪽의 폭력과 보복은 지역 사회에 큰 파괴를 남겼다. 그를 단순한 종교적 영웅 또는 왕당파 도구로만 그리면 이 다층적인 사회적 갈등을 놓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