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를 조직한 행정가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61–1968 정부·행정 · 미국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28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
- 1936워싱턴 법학대학원 졸업, 변호사 자격 취득
- 1936–1944스페리 자이로스코프 인사·재무·경영 담당
- 1946–1949미국 예산국 국장
- 1949–1952미국 국무부 차관
- 1961–1968미 항공우주국 국장
- 1969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우주시대의 관리』 출간
관련 역사 사건
NASA 이전의 관료 경력: 뉴딜에서 국무부까지
제임스 웨브는 NASA 국장이 되기 전 30여 년 동안 뉴딜과 전시 동원, 냉전 국가 건설의 행정 실무를 거치며 대규모 조직을 운영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하원 규칙위원장이자 원로위원인 노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에드워드 W. 포우의 비서로 워싱턴 공직을 시작했고, 포우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초기 입법을 통과시키는 데 조력했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는 전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올리버 맥스 가드너의 법률사무소에서 보조로 일하며 법학 공부를 마쳤다.
1936년 스페리 자이로스코프에 인사 책임자 겸 사장 토머스 모건의 보조로 채용된 웨브는 1944년까지 비서·재무이사와 부사장을 거쳤고, 재임 중 회사는 직원 800명에서 3만 3000명 이상으로 커져 제2차 세계 대전기의 항법장비와 항공 레이더 주요 공급업체가 되었다. 전쟁 발발 후 해병대 재입대를 원했으나 스페리에서의 업무 중요성 때문에 유예되었다가 1944년 2월 해병대에 다시 입대해 제9해병항공단 제1항공경보단을 지휘했으며,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레이더 계획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종전 후에는 재무부 차관이 된 가드너의 보좌관으로 잠시 일한 뒤 대통령 직속 예산국장으로 임명되어 1949년까지 재임했다. 웨브는 가드너와 재무장관 존 스나이더의 추천으로 트루먼에게 발탁되었고, 전시 대규모 지출 이후 재정 균형이라는 대통령의 목표에 맞추어 예산을 편성했다.
1949년 1월 국무부 차관으로 임명된 웨브는 딘 애치슨 장관으로부터 첫 과제로 국무부 개편을 맡았다. 그는 대통령 임명직 12명을 새로 두고 하급 관리의 권한을 축소했으며, 외교 정보와 정보기관 자료의 흐름을 비서실을 통해 통합했다. 1949년 5월 26일 트루먼이 개편 법안에 서명하면서 군부에 영향력을 빼앗기던 국무부는 대통령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당시 국무부의 핵심 쟁점은 소련을 외교적 수단만으로 억제할 수 있는지, 아니면 군사력이 필요한지였다. 정책기획실장 폴 니체가 NATO 병력 증강을 주장하는 기밀 문서 NSC 68을 작성하자, 국방 예산 증액에 반대하던 국방장관 루이스 A. 존슨을 웨브는 트루먼이 설득하도록 이끌어 NSC 68 권고안을 수용하게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웨브와 애치슨은 유엔을 통한 대응, 태평양 함대의 황해 파견, 인민군 전차에 대한 공군 공격이라는 세 가지 건의를 만들었다. 트루먼은 첫 두 가지를 즉시 시행했으나 군사적 대응은 며칠간 미뤘다. 미군 준비 부족에 대한 비판이 국방부로 향하고 존슨이 애치슨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자, 웨브는 의회 인사들과 함께 트루먼이 존슨을 교체하도록 설득했고 은퇴했던 조지 C. 마셜이 국방장관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웨브는 심리전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대학 연구자들과 트로이 프로젝트를 세웠고, 미국의 소리 방송에 대한 소련의 전파 방해를 우회할 방법을 연구하게 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에 국무부의 관심이 쏠리면서 영향력이 약해졌고, NSC 68의 저자로서 애치슨의 핵심 참모로 떠오른 니체가 그의 사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편두통을 겪던 웨브는 1952년 국무부를 떠나 오클라호마시티의 커-맥기 석유회사로 갔으나 정부 자문 활동을 이어가 1958년 드레이퍼 위원회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