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랄라 오마르

جار الله عمر
예멘 사회당 마르크스-레닌주의 예멘 예멘 1942–2002 ✕ 사나에서 암살

예멘의 사회주의 정치가, 통일과 민주화의 옹호자

2002년 12월 28일 사나에서 이슬라흐당 대회 연설을 마친 직후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예멘사회당 부서기장이었다.

1942년 예멘 이브주 쿠할 마을에서 태어나 잠다르와 사나에서 이슬람 법학을 공부했고, 1960년대 사나의 70일 포위전에 참여했다. 1968년 예멘혁명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같은 해 8월 사나 사건 이후 3년간 수감되었고, 1971년 아덴으로 가 1972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통일 예멘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인권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며 야당 연합 결성에 힘썼다.

다른 이름: 자랄라 오마르 알쿠할리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86년 당내 유혈 사태와 다원주의 전환

1986년 1월, 남예멘을 통치하던 예멘 사회당 내부의 권력 투쟁은 당사(黨史)에서 가장 참혹한 유혈 사태로 폭발했다. 정치국원으로서 이 충돌에 깊이 관여했던 오마르는 압델 파타 이스마일과 알리 살림 알비드를 중심으로 한 승리한 파벌 편에 섰다. 메리프(MEHRIP)에 기고한 추모글에 따르면 그는 이 학살을 개인의 야심이나 배신 때문이 아니라 당의 규범과 제약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당내 불만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호 불신이 해소될 통로가 없었고, 그 결과가 무장 충돌이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그를 당내 민주주의의 문제로, 나아가 정치적 다원주의의 문제로 밀어 넣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고 전해진다. “1986년 1월은 전환점이었다. 당 자체에 개혁이 필요한데 왜 북부와 싸우는가?” 남부 마르크스주의 지도부의 토론 억압에도 비판적이었던 그는 1988년의 한 논문에서 정치적 다원주의와 남북 통일을 주장했다. 가디언의 부고는 이 글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즉 그는 통일을 단순한 민족적 요청이 아니라 당내 독점과 언론 통제를 극복하는 문제로 파악한 셈이며, 이 관점은 1990년 통일 이후에도 그가 다원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