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인민위원에서 미국 공산당의 코민테른 대리인 「존 페퍼」로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나 사회민주당 기관지 기자로 일했다. 1918년 부다페스트 병사 평의회 의장이 되었고,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에서 군사·교육 인민위원을 지냈다. 망명 뒤 코민테른 일꾼이 되어 1921년 독일 3월 행동에 관여했고, 1922년 미국에 파견되어 「존 페퍼」라는 이름으로 미국 공산당의 실력자가 되었다. 러브스톤 분파와 함께 부하린 쪽에 섰다가 1929년 코민테른의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다른 이름: 존 페퍼 · 조지프 포가니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18.11부다페스트 병사 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 1919.03.21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군사 인민위원이 되었다.
- 1919.04외무 부인민위원, 이어 교육 인민위원으로 옮겼다.
- 1921.03쿤 벨러와 함께 독일 3월 행동에 관여했다.
- 1922.07코민테른이 미국에 파견해 「존 페퍼」라는 이름을 썼다.
- 1925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코민테른 정보부장을 맡았다.
- 1927.07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 위원이 되었다.
- 1929.09코민테른의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 1937.07.27내무인민위원부에 체포되었다.
- 1938.02.08즉결 재판 뒤 같은 날 처형되었다.
- 1956.05.30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참사회가 복권했다.
「존 페퍼」: 미국 공산당의 코민테른 대리인 (1922~1929)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포가니는 오스트리아를 거쳐 소비에트 러시아로 피신했고, 코민테른 기구에서 일하며 쿤 벨러의 망명 분파와 함께했다. 코민테른은 1922년 7월 그를 미국 공산당의 헝가리인 연맹을 돕도록 파견했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존 페퍼」라는 이름을 쓰고 영어를 익혔으며, 경찰의 브리지먼 대회 급습을 간신히 피했다. 그는 지하 고립을 버리고 대중적 노동당을 건설하자는 노선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가 되었다. 루텐버그와 손잡은 그는 1920년대 후반 미국 당의 두 주요 분파 가운데 하나를 이끌었다. 적대 분파의 제임스 캐넌은 그가 「파산한 회사를 접수하러 법원이 보낸 관리인」처럼 당을 주물렀다고 회고했다.
1925년 포스터·캐넌 분파의 요구로 모스크바에 소환된 페퍼는 코민테른 정보부장을 맡으면서도 루텐버그·러브스톤 분파를 계속 뒷받침했고, 1927년 7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28년 스탈린과 부하린이 갈라서자 그의 견해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9차 총회와 제6차 대회에서 비판받았다. 1929년 5월 코민테른은 미국 당에 공개서한을 보내 「페퍼 사건」을 국제통제위원회에 넘긴다고 알렸고, 9월 그는 코민테른의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같은 해 제10차 총회 테제는 「기회주의적 분파 지도자들(러브스톤, 페퍼)」의 영향이 청산되었다고 환영했다.
해임 뒤 그는 소련 식품공업 인민위원부 홍보부장으로 일했다. 1937년 7월 체포되어 1938년 2월 8일 「반혁명 조직 가담」 혐의로 즉결 재판을 받고 같은 날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