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베르 일리치 파티아슈빌리

ჯუმბერ ილიას ძე პატიაშვილი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39–

트빌리시 비극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89년 4월 시위 진압과 정치적 책임

1989년 3월 18일 리흐니 집회 뒤 압하지야의 지위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커지자, 그루지야 독립운동 단체들은 트빌리시에서 시위를 벌였다. 4월 4일부터 정부청사 앞 루스타벨리 대로에 수만 명이 모였고, 일부는 단식농성을 했다. 4월 7일 줌베르 파티아슈빌리는 소련 지도부에 질서 회복을 위한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다음 날 열린 공화국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소련군 지휘관들은 작전이 유혈 사태 없이 끝날 것이라고 약속했고, 시위대 해산 작전이 승인됐다.

4월 9일 새벽 소련군은 정부청사 앞 집회를 진압했다. 동시대 보도에 따르면 군인들은 곤봉과 참호용 삽, 화학 약제를 사용했고, 병원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700명에 이르렀다. 사망자 수와 사망 원인은 당시에도 혼선이 있었다. 공식 집계는 진압 과정에서 19명이 숨지고 그날 뒤에 한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고 했으며, 새 공산당 제1서기 기비 굼바리제가 4월 25일 일부 사망자가 독성 가스 중독으로 숨졌다고 인정했다. 파티아슈빌리는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후임 지도부는 당 지도부의 소수가 협의 없이 병력 투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보도들은 병력 요청과 작전 승인 과정에 그루지야 당국과 소련 군 지휘부가 함께 관여했음을 보여 주지만, 파티아슈빌리가 최종 작전 명령을 내렸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