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인구적 위기를 외치고 단식으로 맞선 MRP-AEG 공동 창립자
「내겐 양심이 있고, 그래서 내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러 여기 왔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
1987년 8월 라글레 파레크, 티트 마디손 등과 함께 MRP-AEG를 공동 창립하고 히르베파르크 집회에서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집회 후 언론의 인신공격 보도에 항의해 두 달간의 단식 투쟁을 시작했고, 단식 중 붉은 광장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공개를 요구하는 팻말을 들었다가 강제 송환되었다. 이후 에스토니아 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유머 신문 「로사 리프」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87MRP-AEG 공동 창립
- 1987.08.23히르베파르크 집회 연설, 에스토니아인의 인구적 위기 경고
- 1987.09–10언론 비방 보도에 항의하는 두 달간의 단식 투쟁
- 1987.09.30단식 중 붉은 광장에서 MRP 공개 요구 팻말 시위, 강제 송환
- 1988반체제 시위 적극 조직, 당국으로부터 활동 중단 경고
- 1989–1990유머 신문 「로사 리프」 편집
- 1990에스토니아 회의(Eesti Kongress) 대의원
관련 역사 사건
비방 선전 공세의 표적, 1988년 저항의 계속
히르베파르크 집회 직후 당국은 집회 참가자들을 겨냥한 선전 공세를 폈다. 1987년 8월 24일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뷰로는 집회를 '민족주의적·반소비에트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반선전 조치를 지시했으며, 에스토니아 전신통신사(ETA)와 중앙 언론은 조직자들을 '도둑', '사기꾼', '역사를 왜곡하는 도발자'로 묘사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이 공세에서 가장 집중적인 인신공격의 표적이 된 인물이 위리 미크와 라글레 파레크였다. 티트 마디손, 얀 쾨르브, 뒤이어 헤이키 아호넨 등은 결국 강제 출국 조치되었지만, 미크는 에스토니아에 남아 공세의 전면에 섰다.
미크는 1988년에도 가장 활발한 시위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MRP-AEG가 주도한 이른바 '달력 시위'는 에스토니아 역사의 주요 기념일을 겨냥해 짧은 기간에 세 차례나 열렸다. 2월 2일 타르투에서 타르투 조약 기념일을, 2월 24일 탈린에서 에스토니아 공화국 독립기념일을, 3월 25일 탈린에서 1949년 3월 강제이주의 기념일을 각각 기렸다. 당국은 이 행사들을 위해 사전에 대비했고, 조직자들을 정보로부터 차단하고 시위 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며, 필요하면 '커피 초대'라는 이름의 소환과 협박, 예비군 소집 같은 수단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시위는 예정대로 열렸다. 미크는 이 시기 정치범 마르트 니클루스와 엔 타르토의 석방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와 소련·에스토니아 당국에 보내는 공개서한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1987년 8월 31일자 고르바초프 앞 공개서한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