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르트베니 카로이 마리어

Kertbeny Károly Mária
독립 활동 헝가리 헝가리 (독일계) 1824–1882

「동성애」라는 말을 만든 헝가리 문필가·번역가

빈에서 태어나 페슈트에서 자란 헝가리 문필가·번역가. 프랑켄에서 온 집안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카를 마리아 벵케르트였고, 1847년 헝가리식 성 케르트베니로 이름을 바꾸었다. 페퇴피 샨도르·요커이 모르 등 헝가리 시인과 작가를 독일어로 옮겨 알렸고, 기자·여행 작가로 25권이 넘는 책을 냈다. 1868년 5월 6일 편지에서 「동성애」(Homosexual)라는 말을 처음 썼고, 1869년 프로이센 형법 143조의 남색 처벌에 반대하는 익명 소책자 두 편을 냈다. 그가 만든 「동성애」·「이성애」는 크라프트에빙을 거쳐 표준 용어가 되어 울리히스의 「우르닝」을 밀어냈다. 1882년 부다페스트에서 죽었다.

다른 이름: 카를 마리아 케르트베니 · 카를 마리아 벵케르트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헝가리 문학의 번역가

아버지와 다툰 뒤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 벵케르트는 잠시 포병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다 1843년 문필가가 되기로 했다. 1846년 아버지가 죽자 여권도 없이 다시 길을 나서 파리에서 하이네를 찾아갔고 조르주 상드·뮈세와 사귀었으며, 런던을 거쳐 베를린의 카를 아우구스트 파른하겐 폰 엔제에게 갔다. 파른하겐의 권유로 1847년 성을 귀족적인 울림의 헝가리식 이름 케르트베니로 바꾸었다. 1848년 헝가리의 자유 투쟁이 자유주의 지식인의 공감을 모으면서 헝가리 문학을 옮기려던 그의 일에 길이 열렸다. 1849년 『페퇴피 시집』을 시작으로 페퇴피와 요커이 등 헝가리 시인·작가의 작품을 독일어로 옮기는 일이 평생의 중심이 되었고, 베티나 폰 아르님은 1850년 12월까지 그에게 6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 혁명이 진압된 뒤 그는 오스트리아 당국에 자수해 1852년 페슈트에 다시 자리 잡았고, 만년에는 명사들과의 교유를 담은 회상록 『실루엣과 유품』(1861–1863)을 냈다.

「동성애」와 울리히스

1867년부터 1868년 8월까지 하노버에 살던 케르트베니는 1868년 5월 6일 편지에서 「동성애」(Homosexual)라는 말을 처음 썼다. 이 편지는 동성애 남성을 「우르닝」이라 부르며 처벌 폐지를 요구하던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에게 보낸 것이었고,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케르트베니는 남색가 같은 경멸적 낱말을 대신할 분류 체계를 세워, 여성에게 끌리는 남성을 「이성애」, 자위하는 사람을 「모노섹슈얼」, 항문 성교를 하는 사람을 「피기스트」라 불렀다.

1869년 그는 프로이센 형법 143조(뒤에 독일 제국 형법 175조)에 반대하는 익명 소책자 두 편을 냈다. 합의한 사람 사이의 사적인 성행위는 형법이 다룰 일이 아니며, 이 조항이 동성애자를 협박꾼에게 내맡겨 자살로 몰아간다는 자유주의적 논변이었다. 울리히스가 성향이 타고났다는 것을 처벌 폐지의 근거로 삼은 데 비해, 케르트베니는 타고났는지는 “자연의 매우 흥미로운 수수께끼”로 남겨 두고 국가가 사생활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데서 출발했다. 다만 그도 성 충동을 타고나 바뀌지 않는 것으로 거듭 묘사했다. 또 동성애 남성이 본래 여성적이지 않다고 보아, 우르닝을 「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의 영혼」으로 설명한 울리히스와 갈라섰다.

두 사람의 길도 달랐다. 울리히스는 스스로 우르닝임을 밝히고 싸움을 이어 갔지만, 케르트베니는 스스로를 「정상 성애자」라 부르며 물러났다. 그의 일기에는 젊은 남자들과의 만남이 자기 검열된 채 적혀 있고, 울리히스가 체포된 뒤에는 “끔찍한 날들! … 위험한 편지는 모두 태웠다”고 썼다. 1880년 구스타프 예거의 책에 동성애에 관한 장을 써 보냈으나 출판사가 빼 버렸고, 예거는 다른 곳에서 그의 용어를 썼다. 크라프트에빙이 예거의 책에서 이 말들을 가져다 『성적 정신병질』에 쓰면서 「동성애」와 「이성애」는 표준 용어가 되었고, 울리히스의 「우르닝」·「디오닝」을 대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