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에라 다누테 프룬스키에네

Kazimira Danutė Prunskienė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43–2026 ○ 뇌졸중으로 사망

실용주의 노선으로 독립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퇴로 군사옵션의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졌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경제봉쇄와 사임: 실용주의의 한계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가 독립 회복을 선언하자, 고르바초프는 4월 13일 이틀 내 선언 철회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리투아니아가 거부하자 4월 18일 소련은 경제봉쇄에 들어갔다. 마제이케이 정유공장으로의 원유 공급이 중단되고 천연가스 공급이 84% 삭감되었으며, 석탄·전기·의약품·식료품까지 차단되었다. 국경이 봉쇄되고 리투아니아의 은행 계좌도 동결되었다.

프룬스키에네 내각은 독립 선언 이후 국제적 승인도, 독자 통화도, 국가 예산도 없는 상태에서 소비에트군이 주둔한 가운데 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의장 란츠베르기스가 독립 선언의 완전한 관철을 고수한 반면, 프룬스키에네는 모스크바와의 타협과 단계적 협상을 주장했다.

1990년 5월 그녀는 미국·영국·프랑스·서독을 순방하며 부시 대통령, 대처 총리, 미테랑 대통령, 콜 총리와 연쇄 회담을 가졌다. 냉전이 아직 진행 중이던 당시, 소련의 구성국 총리가 백악관과 다우닝가에 들어선 것 자체가 외교적 돌파구였다. 서방 언론은 그녀에게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붙였고, 이는 대처의 '철의 여인'에 대응하는 이미지였다. 이 회담들은 고르바초프에게 협상 테이블로 나올 수밖에 없는 압박으로 작용했고, 7월 2일 74일 만에 봉쇄가 해제되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경제의 피해는 막대했다. 총 손실은 5억 루블을 넘어 GNP의 1.5%에 달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봉쇄 해제 후에도 근본적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다.

1991년 1월 초, 프룬스키에네 정부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가격 인상을 단행했고, 이는 노동자 계층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동시에 소련군은 징집 거부자 색출을 명분으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월 8일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빌뉴스로 돌아온 그날 밤, 각료회의에서 프룬스키에네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그녀의 사임 요구 속에 다음 날인 1월 9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닷새 후인 1월 13일, 소련군은 빌뉴스 TV탑과 방송센터를 공격해 14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했다. 그녀의 사임은 군사옵션 앞에서 마지막 정치적 완충장치 하나를 제거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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