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인민공화국 초기 내무장관 겸 부총리
네고반(현 그리스 플람푸로)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끈 1945년 3~4월 특별법정은 옛 공인 약 60명을 재판해 17명에게 총살형을 선고했고, 일부 동시대인은 그를 당시 알바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보았다.
알바니아 공산당 창당 회의에 참가하고 창당 시부터 정치국원을 지낸 인물로, 1944년 12월부터 인민보위국을 이끌며 시구리미를 장악했고 1945년 3~4월 특별법정을 주도해 반대파를 숙청했다. 1946~1948년 내무장관 겸 부총리를 지냈으며, 티토주의 혐의로 축출·체포되어 1949년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7코르처 공산주의 그룹 창립자·초대 의장. 1930년대 후반 엔베르 호자, 코초 타슈코와 함께 주요 알바니아 공산주의자로 부상했다.
- 1941–알바니아 공산당 창립 회의 참가, 창당 시부터 정치국·중앙위원회 위원.
- 19433월 부재중 조직비서로 선출, 7월 10일 총참모부 위원이 되었다.
- 1944페르메트 회의에서 중장으로 승진하고 민족해방반파시스트평의회(KANÇ) 부의장에 임명되었다.
- 1944–1946인민보위국(Drejtoria e Mbrojtjes së Popullit) 국장. OZNA를 본떠 만든 이 기구가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맡았다.
- 19451945년 3~4월 특별법정을 주도했다. 이 법정은 약 60명을 재판해 17명에게 총살형, 8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 1946–1948내무장관, 부총리, 국가통제위원회 위원장, 인민의회 간부회 부의장, 코르처 선거구 의원.
- 194810월 내무장관에서 산업장관으로 옮겨졌고, 중앙위원회에서 직위를 박탈당하고 제명되었으며 11월 28일 체포되었다.
- 19495월 재판에서 티토의 후원을 받은 암살 음모를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6월 11일 처형되었다.
관련 역사 사건
특별법정과 인민보위국 (1944~1946)
코치 조제는 전후 알바니아에서 국가 폭력 기구를 직접 지휘한 인물이었다. 알바니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1944년 12월부터 1946년 3월까지 인민보위국(Drejtoria e Mbrojtjes së Popullit) 국장을 지냈는데, 이 기구는 소련의 오즈나(OZN)를 모방해 조직되어 체제 반대자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담당했고, 그의 후임은 그의 부관이자 측근이던 네스티 케렌지였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가 내무부와 비밀경찰 시구리미를 이끌었다고 서술하며, ‘스페치알레’ 법원 문서는 그를 당시 알바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탄압 기구 운영은 1945년 봄의 특별법정과 맞물린다. 반파시스트 민족해방평의회가 1944년 12월 25일 내린 결정에 근거해 설치된 ‘전쟁범죄자 및 인민의 적을 위한 특별법정’은 1945년 3월 1일부터 4월 13일까지 티라나에서 열려 31회의 공판에서 60명을 심리했다. 알바니아어 위키백과는 그가 1945년 3~4월 이 법정의 재판장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영어 위키백과도 그를 ‘수석 재판관’으로 서술한다. 다만 영어 위키백과의 특별법정 항목은 그를 검사로 소개하는데, 다수의 알바니아어 사료는 검사 직을 베드리 스파히우에게 돌린다. 어느 쪽이든 그가 이 심판의 주도적 자리에 있었다는 점은 일치한다.
심리 대상은 이탈리아·독일 점령기에 협력했거나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인물들이었다. 친이탈리아파, 나치 협력자, 발리 콤베타르 조직원, 전직 각료, 왕정 지지자, 언론인 등이 포함되었고, 피고 대부분이 유죄 판결을 받아 17명이 총살형, 8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법정 구성원 상당수가 법률 교육을 받지 않은 인물들이었다는 점도 지적된다. 조제 자신의 최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49년 그가 처형된 뒤, 특별법정의 재판관이었던 베치르 발루쿠와 베드리 스파히우를 비롯한 인물들이 뒤늦게 ‘반역’과 ‘인민의 적’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