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공산주의 운동가·외교관
1946년 1월 11일 제헌의회 회의에서 그는 20인 위임검증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첫 회의를 폐회했고, 같은 날 정오 두 번째 회의에서 의회는 알바니아를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했다.
알바니아 공산주의 운동가·외교관. 이집트 파이윰에서 민족운동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베이루트와 하버드를 거쳐 1923~24년 뉴욕 영사, 모스크바 코민테른 학교에서 교직을 맡았다. 1938년 알바니아로 파견되어 1941년 창당에 참여했고, 1943년 민족해방총평의회 서기, 1945년 제헌의회 서기를 지냈다. 1946~47년 모스크바 대사, 외무부 차관, 1954~55년 소피아 대사를 거쳐 당 통제·감사위원장을 맡았으나, 1960년 수정주의 공격 속에 숙청되어 8년 억류와 10년 부렐 형무소 생활 끝에 1980년 석방되었고 1984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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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947
알바니아 국가기관뉴욕 영사·모스크바 주재 대사·외무차관대표
외교·국제활동
경력 연표
- 1920년대 후반모스크바 코민테른 학교에서 영미부문 교직
- 1923–1924뉴욕 주재 알바니아 영사
- 1938알바니아로 파견
- 1941알바니아 공산당 창당 참여
- 1943민족해방총평의회 서기
- 1945제헌의회 서기
- 1946–1947모스크바 주재 대사
- 1954–1955소피아 주재 대사
- 1955–1960당 통제·감사위원장
- 1960숙청: 당 제명, 억류와 수감
- 1969–1980부렐 형무소 수감, 당시 최고령 수감자
관련 역사 사건
1950년대 당 지도부 내의 저항과 1969~1980년 수감
전후 타슈코는 지도부 안에 남아 있었지만, 그 충성은 무비판적 순응이 아니었다. 막스 브륌이 소개한 에르빈 레빈의 전기는 그가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렬 이전부터 알바니아의 베오그라드 예속에 반대했고, 유고슬라비아 고문의 동의 없이는 대규모 투자도 결정되지 않던 상황을 비판하며 평등 원칙에 따른 자립적 경제 발전과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을 주장했다고 전한다. 토지개혁과 나치-파시스트 협력자 재산 몰수, 외국인 투자에 관한 법률들에 그의 서명이 들어갔고, 전국 문맹 퇴치에도 특히 힘썼다. 1948년 이후 그는 오랫동안 외무부 차관을 지내며 모스크바와 소피아 주재 대사로 일했다. 1960년 당 통제·감사위원회 위원장이던 그는 중앙위원회에서 소련과의 결렬에 반대했고, 그해 9월 당의 모든 직책과 곧이어 의원직까지 잃었다. 이후 1969년까지 알바니아 변방에서 억류 생활과 중노동을 견뎌야 했고 가족도 해고되고 억류되었다. 1969년 6월 25일, 70세의 나이에 9년의 억류 끝에 체포되었다. 가족의 탄원은 모두 거부되었다. 딸 테프타의 편지에는 ‘이 반역자가 잔을 채운 이유를 법정이 판단하게 하라’는 호자의 친필이 남았고, 아내 파블리나의 편지는 ‘적 코초 타슈코의 아내에게는 회답하지 말 것’이라는 지시와 함께 흐스니 카포에게 넘겨졌다. 부인과 자녀들은 세만 수용소로 보내져 억류가 5년 더 연장되었고, 그는 1980년 78세로 석방될 때까지 부렐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자료들은 그의 죽음을 처형이 아니라 1984년의 사망으로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