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유지를 택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자
1991년, 그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다가오던 때에도 소련 연방을 지지하는 정치국에 합류했다.
렘비트 아누스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모스크바계 지도자로, 민족 독립과 연방 유지를 둘러싼 분열의 한복판에 섰다. 그는 1990년 12월부터 1991년 8월 당이 금지될 때까지 КПСС 강령을 지지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맡았고, 1991년에는 КПСС 정치국원이 되었다. 당의 해체 뒤에도 프라우다 특파원과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공산주의 정치에 남았다.
다른 이름: 렘비트 엘마로비치 아누스
주요 활동과 소속
- 1990–1991 정치·당 지도 · 소련
경력 연표
- 1941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코흐틀라얘르베에서 출생
- 1963소련 공산당 입당
- 1983–1989잡지 《에스티 코무니스트》 편집장
- 1990에스토니아 공산당 칼리닌 지구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КПСС 강령계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91–1999《프라우다》 에스토니아 특파원, 탈린 시의회 의원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91.01–1991.08
1991.11 당 활동 금지까지 재임
관련 역사 사건
КПСС 강령파 당의 지도와 해산
1990년 3월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20차 대회가 당을 КПСС에서 분리하고 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으로 개편하기로 결정하자, КПСС 강령을 지지하던 대의원들이 회의장을 떠나 같은 달 26일 별도의 제20차 대회를 열었다. 이렇게 갈라진 КПСС 강령계 에스토니아 공산당은 알렉산드르 구세프를 제1서기로 하는 자체 중앙위원회를 구성했고, 같은 해 가을 제21차 대회에서 아누스를 새 제1서기로 선출했다. 아누스는 1990년 12월부터 1991년 8월 22일 당이 금지될 때까지 이 당의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맡았다.
아누스의 지도부는 라트비아의 자매 정당보다 대립적이지 않은 노선을 택해, 1991년 4월에는 에스토니아에서 연립정부에 참여할 용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당은 독립 문제에서 모스크바의 입장을 견지했다. 1991년 3월 3일 에스토니아 독립 국민투표와 병행해 당은 코흐틀라얘르베, 실라매애, 나르바에서 자체 주민투표를 실시했는데, 그 질문은 '주권 에스토니아가 소련 구성국으로 남기를 원하는가'였다. 소련군을 포함한 모든 주민이 참여할 수 있었고, 실라매애의 결과만 공개되어 투표율 83퍼센트, 찬성 89퍼센트로 집계됐다.
모스크바에서는 아누스가 에스토니아 대표 자리를 둘러싼 당내 다툼의 당사자였다. 1991년 1월 КПСС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오레크 셰닌과 기렌코의 제안으로 기존의 에스토니아 대표 엔아르노 실라리를 대신해 아누스를 정치국에 넣으려 했고, 표결에서 아누스가 실라리보다 적합하다고 판정됐지만 고르바초프의 지지를 받은 실라리를 정치국에서 제명하지는 못해 에스토니아 대표 두 명이 정치국에 남았다. 아누스는 같은 해 7월 3일 다시 실라리 제명을 제기했으나 의제에 올리지 못했다. 아누스 자신은 1991년 1월 31일부터 8월 23일까지 КПСС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었다.
당은 1991년 8월 모스크바 쿠데타 시도를 지지했고, 쿠데타가 실패한 뒤 에스토니아 정부는 8월 22일 당을 불법으로 선언했다. 아누스는 이로써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다. 에스토니아 검찰은 쿠데타 시도 기간에 아누스의 당이 무엇을 했는지 약 아홉 달 동안 수사했으나 범죄가 저질러지지 않았다고 결론지었고, 옛 당 간부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당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됐지만 이 과정의 혼란 속에 상당 부분이 사라진 것으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