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가속 공업화의 청사진을 쓴 경제학자, '사회주의 도시' 우르바니스트의 기수
1929년 3월 고스플란 총회에서 삽소비치는 이렇게 선언했다: '사회주의적 생활방식은 자본주의적 생활방식보다 더 경제적이고 값싸야 하며, 따라서 승리해야 한다.'
소비에트 경제학자·우르바니스트. 1929년 『15년 후의 소련』으로 스탈린 가속 공업화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도시·농촌을 집단적 사회주의 도시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1930년 실명 비판 후 숙청당했다.
경력 연표
- ~1924브세스베하(ВСНХ) 계획경제국 철야금속부장
- 1928.11『상공신문』에 「10월 혁명 이후 25-30년 뒤」 발표 — 최초의 일반계획 가설
- 1929.03『15년 후의 소련』 출간 — V차 고스플란 대회와 동시 발행, 3판까지 증쇄
- 1929.03V차 고스플란 대회에서 브세스베하 대표로 최적(가속) 5개년계획 옹호
- 1929.07『계획경제』에 「도시의 문제」 발표 — 우르바니스트-디스우르바니스트 논쟁 촉발
- 1929–1930『미래의 도시』(1929), 『10년 후의 소련』(1930), 『사회주의 도시들』(1930) 연속 출간
- 1930.05.16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결정에서 '반환상적 도약 시도'로 실명 비판 — 이후 소멸
- 1938숙청으로 사망 (정확한 날짜·장소 불명)
관련 역사 사건
우르바니스트-디스우르바니스트 논쟁
1929년 말부터 1930년까지 소비에트 건축·도시계획계를 뒤흔든 '제2차 도시계획 논쟁'에서 삽소비치는 우르바니스트(도시주의) 진영의 기수였다. 1929년 10월 26일 고스플란에서 열린 그의 저작 토론회를 시작으로, 10월 31일 코마카데미아에서 미하일 오히토비치가 디스우르바니스트(탈도시주의) 대안을 제출하며 논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1930년 5월 20-21일 코마카데미아 공개 토론에는 1천 명 이상이 참석했다.
삽소비치의 우르바니즘은 모든 기존 도시와 마을을 철거하고, 대규모 공업단지와 소프호스 주변에 인구 4만~10만 명의 '사회주의 도시(соцгород)'를 건설하자는 구상이었다. 도시는 25층 규모의 주거동, 광대한 공원과 스타디움, 공동 식당·탁아소·도서관을 갖춘 '주거 콤비나트'로 구성되며, 사적 주방과 개별 가정은 폐지된다. 1인당 5~9㎡의 수면실과 모든 생활을 집단화한 공용 공간이 그 핵심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 인간을 완전히 다시 만들어야 하며, 그러려면 일상의 조건을 철저히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사적 가내경제, 즉 언제나 여성 노예화의 원천이었던 '가정'을 파괴해야 한다."
이에 맞선 오히토비치의 디스우르바니즘은 도시 자체를 부정했다. 자동차·라디오·전화가 공간의 제약을 해체했으므로, 개별 조립식 주거 유닛을 자연 속에 선형으로 분산 배치하자는 주장이었다. 오히토비치는 삽소비치의 계획을 "사회주의적 북적임"이라 비판했고, 삽소비치는 오히토비치가 현실 조건을 도약한다고 반박했다.
1929년 당중앙위는 일단 삽소비치 안을 선호했고, 베스닌 형제의 쿠즈네츠크·스탈린그라드 설계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두 구상 모두 스탈린에게는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이며 경제적으로 위험한 실험이었다. 1930년 5월 16일 당중앙위 결정에서 삽소비치가 '반환상적 도약'으로 실명 비판당하면서 논쟁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소비에트 건축은 고전주의로 회귀했다. 그럼에도 우르바니스트 논쟁은 20세기 도시계획사에서 국가 주도 급진적 공간 재편의 가장 과감한 사례로 남아 있다.